아름다운 수필·詩 308

연애편지 / 안도현

연애편지 / 안도현 스무 살 안팎에는 누구나 한번쯤 연애 편지를 썼었지. 말로는 다 못할 그리움이며 무엇인가 보여주고 싶은 외로움이 있던 시절 말이야. 틀린 글자가 없나 수없이 되읽어 보며 펜을 꾹꾹 눌러 백지 위에 썼었지. 끝도 없는 열망을 쓰고 지우고 하다 보면 어느날은 새벽빛이 이마를 밝히고 그때까지 사랑의 감동으로 출렁이던 몸과 마음은 종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리곤 했었지. 그러나 꿈 속에서도 썼었지. 사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괜찮다고. 그런데 친구, 생각해보세. 그 연애 편지 쓰던 밤을 잃어버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타협을 배우고 결혼을 하면서 안락을, 승진을 위해 굴종을 익히면서 삶을 진정 사랑하였노라 말하겠는가. 민중이며 정치며 통일은 지겨워 증권과 부동산과 승용차 이야기가 ..

걸림돌(디딤돌) - 공광규

걸림돌 -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를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 되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

차주일 詩「새 버릇」

새 버릇 차주일(1961~ ) 추억하는 건 늙지 않기 위해서죠. 훗날 당신 돌아왔을 때 바로 나 알아볼 수 있도록 그 찰나를 위해 내 여생을 바치고 있죠. 바라보는 것만으로 당신 가둘 수 있었던 내 눈, 이제 깜박여야만 당신이 와요. 추억은 고통스러운 문장이지만 주인공이 사라지는 건 비극보다도 더 비극적이죠. 당신 모르겠군요. 하루에도 수백 번 눈 질끈 감는 새 버릇을요. 당신의 뒷모습을 잡아둘 방법은 나를 빨리 늙게 하지만, 오늘도 눈 질끈 깜고 당신 뒷모습을 외워요. 눈주름이 당신을 동여매고 있네요. 내 눈물 쓸어주던 당신 손등도 내 표정을 쥐고 늙고 있나요?

물뿌리개 꼭지처럼 - 이정록

물뿌리개 꼭지처럼 - 이정록 물뿌리개 파란 통에 한가득 물을 받으며 생각한다 이렇듯 묵직해져야겠다고 좀 흘러넘쳐도 좋겠다고 지친 꽃나무에 흠뻑 물을 주며 마음먹는다 시나브로 가벼워져야겠다고 텅 비어도 괜찮겠다고 물뿌리개 젖은 통에 다시금 물을 받으며 끄덕인다 물뿌리개 꼭지처럼 고개 숙여 인사해야겠다고 하지만 한겨울 물뿌리개는 얼음 일가에 갇혔다 눈길 손길 걸어 잠그고 주뼛주뼛, 출렁대기만 한 까닭이다 얼음덩이 웅크린 채 어금니 목탁이나 두드리리라 꼭지에 끼인 얼음 뼈, 가장 늦게 녹으리라 - 시집, (창비, 2016)

장석남 시인 <옛 노트에서 >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 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