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수필·詩

물뿌리개 꼭지처럼 - 이정록

schubert 2020. 6. 16. 03:50

물뿌리개 꼭지처럼

 

                            - 이정록

 

물뿌리개 파란 통에

한가득 물을 받으며 생각한다

이렇듯 묵직해져야겠다고

좀 흘러넘쳐도 좋겠다고

 

지친 꽃나무에

흠뻑 물을 주며 마음먹는다

시나브로 가벼워져야겠다고

텅 비어도 괜찮겠다고

 

물뿌리개 젖은 통에

다시금 물을 받으며 끄덕인다

물뿌리개 꼭지처럼

고개 숙여 인사해야겠다고

 

하지만 한겨울

물뿌리개는 얼음 일가에 갇혔다

눈길 손길 걸어 잠그고

주뼛주뼛, 출렁대기만 한 까닭이다

 

얼음덩이 웅크린 채

어금니 목탁이나 두드리리라

꼭지에 끼인 얼음 뼈,

가장 늦게 녹으리라

 

-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