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iden-röslein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슈베르트, 프란츠 페터
Goethe, Johann Wolfgang von, 괴테 (1749 ~ 1832) Heidenröslein「들장미」
Sah ein Knab' ein Röslein stehn, Röslein auf der Heiden, War so jung und morgenschoen, Lief er schnell, es nah zu sehn, Sah's mit vielen Freu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Knabe sprach: Ich breche dich, Röslein auf der Heiden! Röslein sprach: Ich steche dich, Da du ewig denkst an mich, Und ich will's nicht lei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Und der wilde Knabe brach 's Röslein auf der Heiden; Röslein wehrte sich und stach, Half ihr doch kein Weh und Ach, Musst' es eben leiden. Röslein, Röslein, Röslein rot, Röslein auf der Heiden. |
한 소년이 장미를 보았다, 들에 핀 장미꽃. 너무도 싱싱하고 해맑아 소년은 가까이 보려고 달려갔다. 기쁨에 겨워 바라보았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꽃.
소년이 말했다: 널 꺾을 테야, 들에 핀 장미꽃! 장미가 말했다: 널 찌를테야,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난 고통받지 않을 거야.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꽃.
거친 소년은 꺾고 말았다, 들에 핀 장미꽃. 장미는 자신을 방어하며 찔렀다. 하지만 외침 소리도 소용 없이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장미, 장미, 붉은 장미, 들에 핀 장미꽃. |
Schubert 'Heidenröslein'「월계꽃」
슈베르트의 들장미와 베르너의 들장미는 다른 곡입니다.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월계꽃> 과 베르너의 <들장미>는 우리나라 곡명은 다르지만 가사는 모두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시 '들장미 /하이덴뢰슬라인:Heiden-röslein'입니다. 이 노래는 괴테가 젊은 시절 쉬트라스부르크에서 대학에 다닐 때, 프리데리케라는 아가씨를 사랑하던 시절에 쓴 시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이 시는 슈베르트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에 의해 작곡이 되었는데, 베르너 Heinrich Werner가 작곡한 이 노래가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빈 소년합창 베르너의 들장미
1829년에 작곡된 이 곡은 들장미의 아름다움과 순박한 어린이의 서정적인 정감이 깃든 노래로 통속적이며 부르기 쉬워 학교나 가정 등에서 널리 불린다. 8분의 6박자의 두 도막 형식으로 된 2부 합창곡이고 빠르기는 안단티노이다. 1829년에 작곡된 이 곡은 들장미의 아름다움과 순박한 어린이의 서정적인 정감이 깃들인든 노래로 통속적이며 부르기 쉬워 학교나 가정 등에서 널리 불린다C음을 으뜸음 '도'로 하는 장음계에 의한 노래이다. 8분의 6박자의 두 도막형식으로 된 2부 합창곡이고 빠르기는 안단티노이다.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의 <월계꽃> 과 <들장미>는 곡명은 다르지만 가사는 모두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시 '하이덴뢰슬라인:Heiden-röslein'이다.
프리츠 베르너(Fritz Werner)는 작곡가인 동시에 합창 지휘자로서 멘델스존 상을 받은 바 있으며, 1936년부터 베를린과 포츠담에서 교회음악가로 활동했다. 1947년에는 하인리히 쉬츠 합창단을 창설하여 직접 이끌어 서독의 일류 합창단으로 키워냈다.
이안 보스트리지 (Ian Bostridge)
페터 수라이어가 사라진 지금 영국 출신의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독일 리트의 맥을 잇는 최고의 유망주로 세계 음악팬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생년월일은 1964년 12월 25일이며 현재 작가인 아내와 만 두 돌이 된 아들 올리버 벤자민과 가족을 이루고 있다. 이안의 풀네임은 이안 찰스 보스트리지이며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작곡가는 페터 프란츠 슈베르트라고 한다.
이안 보스트리지는 음악 활동을 하기 이전에 캠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역사와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보스트리지는 어려서부터 관심을 가져온 성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93년 영국 위그모어홀 공연을 통해 성악가로 데뷔했다. 상당히 늦은 나이에 출발했지만, 노래에 철학자의 지성과 시인의 감성을 풍부하게 실어낸다는 호평을 받으며 국제적인 성악가로 급성장해왔다.
그의 런던에서의 데뷔 리사이틀은 1994년 절찬을 받은 <겨울나그네>였으며 위그모어 홀에서의 첫 번째 솔로 리사이틀은 1995년 로얄 필하모닉 협회의 신인상을 받았다. 위그모어 홀에서의 리사이틀이 연일 매진을 기록한 이래로 그는 프랑크푸르트, 쾰른에서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에딘버러, 앨드버러, 첼튼엄 페스티발에 참가했다.
콘서트에서 그는 사이먼 래틀, 콜린 데이비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같은 지휘자들과 협연했으며 오페라 무대에서의 신뢰도는 영국 국립 오페라단에서의 타미노 역(모짜르트의 <마술피리>)를 포함하여 로얄 오페라단에서의 피터 퀸트 역(브리튼의 <나사의 회전>)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 주었다. 1998년 그는 뮌헨 페스티발에도 데뷔하였다. (몬테베르드의 <포페아의 대관>에서 네로 역과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그는 런던, 암스텔담, 빈, 뉴욕, 샌프란시스코, 리스본, 본, 브뤼셀, 파리, 스톡홀롬에서 리사이틀을 갖고 있으며 한스-베르너 헨체는 이안 보스트리지를 위해 새로운 가곡 전곡을 작곡하고 있는데 이 곡들은 1999/2000년 시즌에 세계 초연 되었다. 훌륭한 레코딩의 목록들이 늘어나면서 그는 지난 1997년 글라인드본에서 열린 EMI 100주년 갈라에 특별히 초청된 아티스트 중의 한 명이었다.
최근 그는 자신의 고향인 영국을 대표하는 브리튼의 작품과 영국 가곡을 녹음한 음반2개를 발표해 차세대 테너로서 자신의 기량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실내악단 브리튼 신포니아와 협연해 만든 'The Britten' 음반에는 브리튼이 정리한 포크송과 자장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음악을 경쾌하고 소박하게 불렀다. 세련된 가창력과 우아하고 명백한 표현력으로 곡들을 소화해 냈다는 평이다.
한편, 또 하나의 음반인 "The English Songbook'에는 피아니스트 줄리어스 드레이크와 함께 무명 작곡가 14명이 만든 곡을 담았다.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곡을 그만이 가진 풍부한 가창력으로 노래해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해 낸 것이다. 96년 그라모폰 성악상을 수상한 바있는 보스트리지는 서정정이 짙게 배인 그 특유의 가창력으로 유럽에서 슈베르트를 가장 잘 표현해내는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으며 리트가수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하고 있다.
'슈베르트' 이야기---(4)
부친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
'슈베르트'의 부친은 '슈베르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나는 그가 다섯 살 때 초보 교육을 가르쳐 주고 여섯 살 때 학교에 넣었는데, 언제나 그는 그 반의 수석을 차지했다. 친구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해서 자유시간에 유쾌한 친구들과 어울릴 때만큼 기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여덟 살 때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는데, 쉬운 이중주는 나하고 같이 꽤 잘 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리히텐탈의 성가대의 지휘자, 성가대장인 미하엘 홀쩌에게서 배우게 하였다. 홀쩌는 한두 번이 아니라 눈물마저 글썽거리면서, 이런 학생을 가르친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고 보증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다 할 교육을 시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와 더불어 얘기만 해도 마음속으로 경탄할 뿐이었습니다." 피아노의 초보를 가르쳐 준 것은 맏형인 이그나쯔이다. 몇 달 뒤에
"이젠 형님의 레슨을 받을 필요가 없다. 나머지는 나 혼자서 어떻게든 연습하겠다." 는 말을 듣고 나도 그만 놀랐다. 그리고 실상 얼마 뒤 나보다는 훨씬 훌륭한 스승이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는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홀쩌 밑에서 어린이는 온갖 유익한 조언을 얻었다. 노래할 뿐 아니라 교회의 노래를 반주하는 파이프 오르간도 연습했다. 화성법―그 무렵의 명칭에 의하면 통주저음(通奏低音)―도 공부했다. 그는 주어진 주제를 바탕으로 조그마한 전주곡이며 간주곡을 건반 악기로 즉흥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홀쩌는 감격한 나머지 외쳤다.
"저 조그만 손가락에 이 아이는 화성을 모조리 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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