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때로, 교회 첨탑과 경건한 신앙인, 어느 목사의 유창한 설교, 성스러운 바이블이 아니라,
한 곡의 선율 속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하곤 한다는 어떤 감상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Spem In Alium (Thomas Tallis) - Tallis Scholars
이 현기증 나는 흔들림의 의미를 그렇게 무마하고 망각하면 그만인가. 16세기 영국 작곡가 탈리스의 라틴 교회음악이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대 죽음을 아는가. 그대 멸망을 아는가….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그 질문, 그 흔들림이, 악기 반주 없이 인간의 목소리만으로, 절망을 넘어선 화해의 경지를 구성한다. 절망이 아름다운 공空의 건축물로 들어선다. 스펨 인 알리움 하부이…내 희망은 오로지 당신뿐…광신인가? 아니다. 음악은 흔들림을 매개 삼아 더 드높은 아름다움의 경지를 연다. 그리고 그렇게 더 우월한, 이성과 이성 바깥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음악예술 이성理性의 길이 펼쳐진다.
유토피아? 아니다. 그 길은 절망을 머금은 길이므로 실패가 없고 시각의 독재를 벗어나 귀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한다. 그 상상력은 펼쳐질 뿐 아니라 온몸을 적신다. 그래서, 어떻게? 비데테 미라쿨룸(보라 기적을)…호모 쿠이담(어떤 사람이)…아우디비 보쳄(목소리 들린다)…칸디디 파크티 순트(휘황한 백열로)…탤리스의 라틴 교회음악은 그렇게 이어지다가, 가사歌辭의 종교성을 벗으며 잠시 침묵이 더 무겁다가, <스펨 인 알리움>(1573)에 도달한다.
이 음악에 이르러 우리는, 귀를 가진 우리의 몸은 벌써 고통의 비[雨]에 흠씬 젖은 세상으로, 드러난다. 20개 성부聲部가 주主선율을 모방하면서 연속적으로 등장, 그 세상이 여러 겹의 아름다움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마치 끊임없이 펼쳐질 것처럼. 선율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닮아가고 목소리가 끊임없이 선율을 닮아간다. 음악의 몸과 우리의 몸이 구분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끊임없이…그러는 사이 어느새 또다른 20개 성부가 새로운 주제를 갖고 들어선다. 그,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지만, 음악도 우리 몸도 음악의 세계이므로, 단절일 수 없고 단순한 이어짐일 수 없다. 아, 나는 역사 속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유토피아의 절규들이 단절을 넘어 위대한 공空을 이루는 광경을 보고있는가. - 김정환 저『내 영혼의음악』(청년사) 인용
1573년 40번째 생일을 맞은 앨리자베스 여왕의 축하공연을 위해 토마스 탈리스가 헌정한 음악이라고 해요.
5성부로 이루어진 8개의 합창단이 함께 노래하는 장대한 모테트인데요.
르네상스 시대의 다성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 한 멜로디를 따라 각 성부의 화음이 붙여지는 형식이 아니고
각자의 성부들이 각기 다른 멜로디를 부르는 대위법 형식의 음악들이었습니다.
즉, 40성부라는 것은... 40개의 멜로디가 각기 따로 움직이면서 유기적으로 하나의 음악을 이룬다는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