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수필·詩

[스크랩] 법정스님 -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schubert 2010. 9. 23. 23:33

법정스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오직 지금 이 순간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라

멋쟁이, 맑은 영혼

시공을 초월한 삶과 죽음

당당함, 단순, 간단 명료

법정스님은 빼어난 안목의 소유자였다.(김기철 도예가)

 

 

 

김순희 씨 / 고 정채종씨 부인

"(남편 사망 후)내가 집안 어른이 되어줄게 걱정하지마."

정동창 / 해외촬영 동해

"한쪽에는 메모지, 한쪽에는 책. 책을 보시다가 중요한 부분은 색연필로 표시하셨다."

 

스님은 내 책과 생각에 공감해 준 사람들에게 깊이 감사함.

숨겨져 있던 법정의 ‘선행’과 ‘나눔’

끊임없이 사랑하라.

 

[法頂 -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고소리가 깊은 산중의 정막을 깨웁니다. 마음 속 번뇌를 비우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참선수행의 시간. 큰 스님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지금 그 의미가 유난히 크게 다가옵니다. 그날 법정스님은 평소 입던 승복에 얇은 가사 한 장만을 덮은 체 행지실 문을 나섰습니다. 스님의 유지에 따라 일체의 장례의식을 생략됐고 그만큼 이별의 시간은 짧았습니다.

 

 

 

청학스님 / 길사상 초대 주지 스님

"흔히들 임종 때 선문답으로 묻는 것인데 지금 이 수간, 스님은 어떠십니까? 물었어요. 그 당시에 스님은 벌써 말씀을 잘 못하셨어요. 그러니까 종이를 달라고 해서 바로 썼던 게 원래부터 생과 사가 없어, 그 말씀이에요. 그래서 이것도 기운이 없으셔서 글씨를 다 마무리를 하지 못하셨는데 그래서 다시 옆에서 확인을 하니까 본래부터 생과 사가 없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넓은 절 마당이 아닌 송광사 뒤 거친 야산. 화려한 만장도 일체의 추모의식도 없이 다비식은 순수하게 법구를 태우는 다비의식만으로 진행됐습니다. 스님의 법구는 높은 연화대가 아닌 참나무 단위에 그대로 놓였습니다. 그 위로 다시 참나무들이 쌓였습니다. 나무들 사이 바닥에 놓인 법구가 밖으로 그대로 드러납니다.

 

혜산스님 / 법정스님 손자 상좌

"바로 어제까지 병원에서 손잡고 계시던 분이 하루아침에 불 속에 타오르니까 그게 너무 안타까웠고......"

 

슬픔마저 번거롭다는 듯 생전 스님의 삶처럼 간소하고 단순하게 진행된 다비의식.

 

조세현 / 2년전 영정사진 촬영

"그때는 그 사진이 그렇게 빨리 쓰일 줄 상상도 하지 못했죠. 옆에만 있어도 그만큼 많은 영향을 주었고 위로가 됐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어요. 그래서 우리들 욕심이지만 조금 더 계셨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마지막 가는 길까지 철저한 무소유를 보여준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우리 마음의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스님은 사리조차 찾지 않도록 당부했습니다. 무엇하나 남김없이 비우고 떠나겠다는 스님의 뜻이었습니다. 유난히 더디게 찾아온 봄. 간밤에 내린 봄비로 꽃들이 마침내 제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목련도 좋아하셨어요?"

덕현스님 / 길상사 주지 스님

"목련은 별로 안 좋아하셨는데 자목련은 좋아하시더라고요."

 

 

한 달 전 스님의 법구 행렬이 나섰던 문입니다. 그 안쪽에 스님이 입적 전까지 주지실로 쓰던 행지실이 있습니다. 설법 전에 추모객을 위한 빈소가 마련돼 있지만 평소 번잡함을 싫어하던 스님을 위해 따로 이곳에 스님을 모셨습니다. 법회가 끝나면 머무르는 법 없이 이 방에서 차 한 잔을 마신 후 홀연히 떠나곤 했던 스님,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나 봄을 이루는 것이라 했던 스님은 채 봄이 오기도 전 이 방에서 입적하셨습니다.

 

덕현스님 / 길상사 주지 스님

"법정스님 입적 하루 전 상황은 어땠나요?"

"마지막 제가 가서 2시간 동안 얘기하고 할 때도 저녁에 갑자기 팥죽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팥죽 잘 하는 어떤 집 얘기하시며 그 집 팥죽을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 사다 드렸더니 아주 맛있게 드셨고 마지막까지 아주, 그 고통 속에서도 여여하게 또 행복하게 마지막 하루까지 지내셨죠."

 

지난해 봄 법회 날, 폐암 투병 중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법문 시간에 맞춰 길상사로 들어섰습니다. 새벽에 강원도 산골 오두막을 떠나 먼 길을 달려오신 길이었습니다.

 

"이 눈부신 봄날, 새로 피어나는 꽃과 잎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각자 이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꾸어 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보기 바랍니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가요.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봄날은 간다. 덧없이 갑니다. ……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듣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해마다 봄 법회가 되면 가슴이 설렌다던 법정스님. 이날이 마지막 봄 법회가 될 것을 스님은 예감하셨을까요. 떠나기 전 차를 마시러 행지실로 올라오시던 스님.

 

"아직도 촬영 중인가? 촬영하는 거야?"

"오늘 행운을 잡았어."

"점심들 드시고 촬영하세요."

그날 스님이 남겨주신 웃음은 봄날처럼 따뜻했습니다.

 

도현스님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누군가 사모하는 사람, 믿는 사람, 신의를 가지고 늘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떤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인생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내 마음속에는 법정스님이 그런 존재예요."

 

그리고 가을, 오랜 만에 스님 오셨다는 소식에 다시 찾아간 길상사. 스님은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도량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계셨습니다.

 

"좋은 스님들이 모여야 좋은 도량이 된다고 집만 고쳐서는 좋은 도량이 안 되고 좋은 스님들이 모여야 좋은 도량이 돼 잘 왔어. 주지가 외호를 잘 해야 해."

 

이따금 치료 차 길상사를 찾아올 뿐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상좌들 곁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남에게 폐가 되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스님의 성정 때문입니다. 스님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김현식 / 한의사

"누구나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을 표현하는데 법정스님께서는 정말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지 않게끔 극기로 인내하시는 모습을 보고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마지막 계절이었던 지난 가을과 겨울. 법정스님은 제주도에 계셨습니다. 범섬이 바라다 보이는 서귀포의 범환마을. 스님이 생의 마지막 6개월을 보낸 곳입니다. 그 곁을 한의사 김현식 씨가 지켰습니다.

 

"오랜만에 와 보니까 어떠세요?"

"스님이 앞에 가시는 것 같아요. 제가 뒤따라가는 것 같고... 이 길로 애서 스님이 예전에 저기 언덕 있죠? 저 언덕을 힘이 들어 못 올라가셨어요. 저기는 얕은 언덕이잖아요? 그래서 그 밑에까지만 가시고 돌아오시다가 나중에는 언덕 너머 저기까지도 가셨어요. 그리고 저 소리 있죠? 파도 소리, 이 소리를 좋아하셨어요. 듣기 좋다고 하셨어요."

 

산골 오두막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엔 스님의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곳을 찾아 낯선 이곳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매일 바닷가에 나와 단조로운 바다를 바라보면 스님은 바다 넘어 눈 덮인 강원도의 산을 그리워하셨다고 합니다. 해가 뉘엿할 때면 이곳 국수집에 들르곤 했습니다. 국수는 평생을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신 스님이 가장 즐겨 드셨던 음식입니다.

 

"여기 오셔서 국수를 꼭 저녁 식사 대신 드셨어요."

"옛날 불일암에 살 때도 저녁을 거의 국수만 드셨어요. 십 몇 년을 그렇게 드셨죠. 아침에 빵 딱 두 쪽 드시고 점심은 밥을 잘 차려 드시고 저녁에는 국수를 삶아서 아주 가볍게"

 

마을 주민들은 스님이 이곳에 머무르고 계시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셨던 법정스님. 그런데 이곳에서 우리는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스님의 한 면모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고, 여기 앉으세요, 아이고"

"안녕하세요."

 

4달 만에 다시 만난 김현식 씨를 할머니는 곧 기억해 냈습니다. 오랫동안 관절염을 앓고 계시지만 돌봐주는 가족 없이 홀로 살고 계시는 김정순 할머니.

 

김정순 / 92세, 법환마을

"뼈가 어느 뼈든 안 아픈 뼈가 없어"

"겨울에 안 추우셨어요? 그때 등 사다 드렸던 것..."

 

난방이 되지 않는 단칸방. 지난겨울 요긴하게 썼던 난방기구가 어떻게 왔는지 할머니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 법정 스님이 제주도 왔다 갔다고 하던데?" (김정순 할머니)

"작년에 쌀과 고기와 (난방기구). 법정스님이 드린 거예요." (김현식 씨)

"아이고, 그랬어요? 아이고" (김정순 할머니)

"모르셨어요, 할머니?" (사회복지사)

"몰랐어요. 모르고 먹었어요. 저기 쌀 한 포대 있어요. 지금도" (김정순 할머니)

 

쌀이며 고기며 식료품들도 다른 사람을 통해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분(사회복지사)이 사온 줄 알았어요." (김정순 할머니)

"(법정스님이) 그 분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오래오래 하세요. 스님이 계속 하늘에서..." (김현식 씨)

"돌아가신 후에야 법정스님이라고 좋은 일 한 양반이라고 그제서야 다 그렇게 말들을 하더라고. 아이고, 저런 좋은 양반이 저렇게 죽어서 나무토막 위에 쌓이고 저러는가... 해다 줘도 누가 해준 줄도 모르고 그래도 누가 해왔나 묻지 말고 가져오면 받아서 먹으라고 그런 말을 해서 난 아직도 그 양반(사회복지사)이 해준 줄로만 알고 너무 고마운 어른이야. 그러고 먹었는데 오늘에야 이걸 그 스님이 해다 준 줄 알았죠." (김정순 할머니)

 

제주에 머무르는 동안 현식씨는 자주 몸이 불편한 독고 노인들을 찾아가 침을 놔 드리곤 했습니다. 법정스님의 부탁이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스님은 자신보다 먼저 다른 분들을 찾아가 도와주기를 원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을 시켜 도움을 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늘 다짐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만 스무 명이 넘는 노인들이 스님으로부터 같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눈과 귀가 쇠약해지고 역시 관절염을 앓고 있는 권정생 할머니는 법정스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듯 했습니다. 일제시대에 남편을 잃고 평생을 홀로 사셨다는 권정생 할머니. 젊은 시절엔 바다에서 물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수심 깊은 데도 가고, 많이 나올 때는 또 깊은 데 못 가는 사람은 밥벌이 밖에는 안 되고" (권정생 할머니)

"(물질)몇 년 동안 하셨어요?" (덕현스님)

"한 20~30년, 경북도 가보고 전라도도 가보고......" (권정생 할머니)

 

스님의 책에서 얻어지는 인쇄비가 모두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아간 사실은 스님의 입적 후에야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네. 네. 평안하게 잘 지내세요. 음식도 잘 드시고" (덕현스님)

 

법정스님

"내가 받은 도움에 비하면 내가 남을 도운 일은 그 백 분의 일이나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게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덕이란 어디서 오겠습니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선뜻 도울 때 덕이 자랍니다."

 

 

평생 맑고 향기로운 차를 곁에 두고 즐겨 드셨던 스님. 스님의 삶에선 늘 차의 향내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차를 따 보시면 차를 만드신 분의 성품을 말씀하시더라구요."

"마음의 상태로써는 어떨 때가 제일 차 맛이 좋습니까?"

"무심할 때. 내 마음을 어디에도 빼앗기지 않을 때 있는 그대로일 때, 그때가 제일 좋아요." (법정스님)

 

스님이 산 중에서 홀로 살며 더 철저한 수행의 길로 접어든 이곳 바로 조계산 자락에 숨어 있는 작은 암자 불일암입니다. 75년의 이곳은 절터만 남아 있던 빈 땅이었습니다. 그때 스님을 맞아 준 건 벚꽃이었습니다.

 

덕조스님/법정스님의 상좌

"이곳에 벚꽃이 지금 우물가에 피고 있는데 벚꽃이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표현하셨거든요. 그리고 처음으로 산사로 와서 정착하시게 되니까 이곳이 당신 안식처가 되신 거죠."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니며 수행과 삶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불일암. 군사독재 시절 승려로선 유일하게 민주화운동 핵심에서 활동했던 법정스님이 모든 곳을 떨치고 이곳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인혁당 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혜국 스님

"그 어른(법정스님)이 인혁당 사건에서 죄 없는 젊은이들이 형장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약 석 달, 넉 달, 눕지를 못했답니다. 거의 잠을 못 잤고 실질적으로 남의 문제로 본 게 아니라 이것은 내 목숨이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그분이 얻어낸 결론이 이것은 가자 자기 마음 수행의 길 밖에 없다 마음 수행 없는 모든 제도는 공염불이다 바깥에서 모든 해결점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각자 내 안에서 나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그런 고민을 무척 처절하게 하셨다고 봐야죠."

 

손수 불일암을 지은 뒤 그 속에서 스님은 오직 철저한 수행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직접 공양을 하고 엄격하면서도 간소한 자기만의 질서를 지켜갔습니다.

 

"스님 공양(식사)은 간단명료, 쉽게 말해서 번다하게 반찬을 준비하지 말라 하셨고 일식삼찬, 일식이찬"

 

 

암자 한 귀퉁이 스님이 직접 밥을 짓던 부엌입니다. 한 눈에도 간소하고 소박한 살림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변의 나무로 스님이 손수 만들었던 의자는 세월의 무게를 못 이겨 다리가 부러져 있습니다. 한쪽엔 불일암보다 역사가 더 오래된 양은 세수대아가 있습니다. 스님이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불일암은 스님 계시던 때 그대로 보존돼 있었습니다.

 

덕인스님 / 법정스님의 상좌

"큰 스님께서 책을 집필하시고 정진하시던 법당입니다. 스님께서 주무시고 기도하시던 곳이죠."

 

 

방안에서도 스님의 깔끔한 성품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17년 수행 생활을 함께 했던 손때 묵은 유품들도 질서 있게 정돈돼 있습니다. 도량이 청정해야 삼보가 깃들고 수행자의 수행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늘 주위를 정갈하게 가꿨던 스님입니다. 무소유의 근간이 됐던 간디의 사상 책도 보입니다. 낮엔 도량 일을 하고 밤이면 수행 생활에서 얻은 깨달음을 글로 풀어냈습니다. 글쓰기는 스님의 수행의 또 다른 방편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삶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스님의 대표적 저서 무소유도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17년간 인적 드문 산 속에서 홀로 수행한 스님에게 때로 벗이 되고 때론 깨달음을 준 매개체는 바로 자연이었습니다.

 

덕인스님

"수행자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면들에 제가 감화 받았습니다. 이끼가 이렇게 크게 자랍니다. 주위에 산 다니시며 이끼들을 떼어 와 손수 심으셨죠. 손수요? 네. 개울가나 계곡에서 떼어 오셨겠죠."

 

법정스님

"꽃은 필 때도 고와야 하지만 질 때도 고와야 해요. 어떤 꽃은 새잎이 나도 가장 자리가 누렇게 빛이 모두 바랠 정도로 있는데 이 모란은 진짜 영랑의 표현대로 무너져 내리더라고. 나는 과거에도 사랑을 많이 했고 지금도 사랑을 하고 있고 미래도 사랑을 할 거라고. 사랑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란 뭐예요. 늘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이고 사랑할 수 없다면 이미 멈춘 심장 아니겠습니까?"

 

송광사의 공양보살로 일하며 30여 년간 스님의 채마밭 일을 도왔던 김현심 보살.

 

김현심 보살

"이렇게 채소를 가꿔서 먹으면,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가꿔서 먹는 게 제일 사람에게 좋다고 하시면서 산 속에서 왜 이런 것을 사람들이 안 가꿔서 먹는지 모르겠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스님. 사다가 드시던지, 이 밑에서 가져다 드시지 뭐하러 귀찮게 여기서 이런 것 키워 드시냐고 하면 그런 것 아니라고. 막 혼을 내요."

"국수도 말아 주셨을 텐데 그 국수 맛은 어떠셨어요?"

"맛있어요"

"어떤 맛이에요?"

"담백하고 맛있어요. 시원하게 육수를 내서 시원하니 맛있어요. 양념장도 직접하시고 칼질도 우리보다 더 잘해요. 우리 스님이..."

"칼질 솜씨가 좋으셨군요?"

"네, 칼질 솜씨도. 못하는 게 없다니까요. 우리 스님은. 잘 하세요. 뭐든지 잘해요. 우리 스님은"

 

그런데 꽃과 나무에 대해서만은 유독 깐깐한 속내를 보이셨다고 합니다.

 

"여기 (제가) 스무살 때 왔는데 여기 꽃이 너무 많이 있는 거예요. '스님. 모란 꽃나무 하나 주세요' 그러니까 안돼! 달맞이꽃이라도 여기서 하나만 베었다 하면 품삯 없어. 공보살은 품삯 없어. 그러셨어요." (김현심 보살)

 

밭일을 할 때면 늘 스님과 함께였습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일구는 봄. 금방이라도 스님이 호미를 들고 나타나실 것만 같습니다. 지리산 깊은 한 자락의 또 한 분 스님을 그리워하는 이가 있습니다. 불일암에서 스님을 모신 적이 있다는 도현스님입니다.

 

"소나무, 파초, 수선화. 달마에게 혜가가 찾아갔을 때 '믿음을 보여라' 법정스님 재미있는 분이에요. 다들 몰라서 그렇지 좀 날이 선 부분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 않아요. 굉장히 부드럽고 좋은 점도 많아요. 그리고 유머가 있으세요. 멋쟁이지. 한마디로"

 

도현스님은 인가 없는 깊은 산 중에 작은 암자를 지어 놓고 16년 째 홀로 수행중입니다. 법정스님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이 수행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법정스님을 만나면서 아, 중노릇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법정스님을 모시고 살면서 내가 중노릇을... 과정을 목적시하게 됐어요. 과정을 한 순간, 한 순간, 이 자체가 목적이야 나중에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지금 한 순간, 한 순간, 오늘 내일 이렇게 살아가는 이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이거지. 과정적 목적이다. 법정스님 모시고 살면서 그런 걸 깨달았어요. 당신 삶이 그래요."

 

그러나 법정스님은 홀연 17년간 머물렀던 불일암을 떠나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스님. 부산에서 왔습니다. 스님 뵈러"

"그랬어? 부산에서?"

 

명성이 알려지면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이 성격에 맞지 않지만 시은에 의존해 살아가는 승려로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스님. 그러나 명성과 명예를 소유하고 번잡한 격식에 얽매이는 것만은 극히 경계했습니다.

 

"행복이란?"

"행복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소득이 얼마 이상 되어야 행복한 사람이고 또 그 이하는 불행한 사람. 이렇게 따질 수는 없는 거고. 자기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만족하고 고마워할 줄 알면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만족하고 고마워 할 줄 알면 그건 행복일 거예요." (법정스님)

 

 

스님 입적 직후인 지난 3월말. 서울에서 5시간을 달린 끝에 평창 오대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법회가 끝나면 스님이 홀연히 떠나오던 바로 그곳입니다. 찻길이 끊기고 스님의 오두막으로 가려면 이 개울을 건너야만 합니다. 3월말인데도 산은 폭설에 덮여 있었습니다. 사람 흔적 대신 산짐승 발자국이 눈에 띱니다. 제주도에서 그리워하시고 입적하는 순간까지 스님이 돌아오고 싶어 했던 곳 그러나 그 소박한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오르는 사이 스님이 자신의 오두막에 수류산방에 이름을 붙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법회가 있는 날이면 눈비나 계절에 아랑곳없이 세상에 나와 중생을 앞에 서던 스님이셨습니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산의 끝자락에 스님이 불일암을 떠나 처음 머물던 당시의 화전민의 폐가가 있었습니다. 스님의 책에 실려 있던 그곳으로 생전에 외부로 공개된 적이 없던 오두막입니다. <오두막 편지>, <홀로 사는 즐거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등 스님의 주옥같은 책들도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여럿 속에 어울리면 편하죠. 몸은 편한데 혼자 있을 때 그 아주 홀가분한 그 맛이 없어요. 거지도 제 멋에 산다고 하듯이 혼자 지내다보니까 조금 몸은 고단하고 불편하지만 거리낌 없이 아주 홀가분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어요. 여럿이 어울리면 못 가질 시간을, 물론 이기적이죠." (법정스님)

 

 

그 후 옆에 새로 오두막을 짓고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채 7년을 사는 동안 스님은 홀로 깨달음을 정진하고 묵묵히 그 과정을 즐겼습니다. 스님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방식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곳입니다. 스님은 마지막 순간 세상에 알리지 않고 이곳에서 조용히 입적하기를 소망했습니다.

 

"제가 산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책과 차와 음악과 채소밭이 내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주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법정스님)

 

"해지네,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저녁이 되면 산 너머로 져버리듯이 우리 인생도 금방 가는 거야. 나도 엊그제 일월이나 처월이처럼 어렸던 것 같은데 인생을 하루로 보면 벌써 정오가 지났어. 저녁을 향해 가고 있지. 금방 나도 노스님처럼 인생이 끝나겠지. 우리 인생이 굉장히 짧다는 것을 알고 더 좋은 나로 발전해야지." (덕현스님)

 

 

수류산방에도 봄이 찾아 들었습니다. 17년을 홀로 사는 동안 스님은 제자들에게 조차 거처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종종 제자들에게 가져다주시는 채소들은 이 밭에서 난 것들이겠죠. 밭을 일굴 때 나오는 돌로 쌓았다는 탑에서도 스님의 안목이 느껴집니다.

 

"이렇게 무거운 돌을 어떻게 쌓았을까?" (덕현스님)

 

산중에 홀로 계시면서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고자 했던 스님의 의지였을 것입니다.

 

"법정스님도 건너기 힘든 물을 여름철 장마 졌을 때 일부러 애써 건너와서 사람들에게 법문도 하시고 발목이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나오셔서 사람들도 만나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진정으로 안으로 안으로 더 큰 외로움 속으로 그렇게 들어가신 힘으로 더 크게 회향(내가 안으로 얻은 것을 다시 세상에 되돌리고 베푸는 것)하셨던 거예요." (덕현스님)

 

 

스님을 늘 홀로 계셨지만 홀로 사는 삶에서 깨달음을 책을 통해 세상과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입적하시기 전 스님은 뜻 밖에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간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책들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였습니다.

 

"팔이 저리고 힘이 없으셔서 아마 거의 마지막에 한 사인이실 것 같은데"

"왜 절판을 생각하게 되셨을까요?"

"이미 할 말은 다했고, 써야 할 것들은 다 썼다고 생각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몰라서 실천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이제는 그 가르침이나 글의 메시지들을 삶 속에서 실천해 가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이나 자유를 삶의 보람을 스스로 자기 길에서 발견해 가도록 바라신 거죠." (덕현스님)

 

스님은 자신의 책뿐만 아니라 평생 곁에 두고 아끼던 다른 책들도 다른 사람에게 전해달라 유언을 남겼습니다. 스님 철학에 바탕이 된 여섯 권의 책은 40년 전 스님이 봉은사에 머물던 시절 신문을 배달해 주던 소년에게 전달됐습니다.

 

40년전 신문배달 소년 강씨

"스님은 큰 뜻을 가지고 돌아가셨는데 스님에 대해 제가 어떤 누라도 끼칠까봐 그런 것이 걱정됩니다. 그래서 제가 상당히 조심스러웠고 오늘도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제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여러분이 양해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법정스님은 평생 그의 운명과도 같았던 책과의 인연 책에 대한 집착까지 모두 내려놓고 떠났습니다. 우리에겐 산골 오두막의 이미지로 각인된 스님이지만 스님의 고향마을은 바닷가에 있습니다.

 

임준문 / 74세, 우수영 마을 후배

"정문에서 들어오면 제일 오른쪽, 제일 북쪽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 위치입니다. 작은 아버지, 할머니 방은 여기였고 여기가 매표소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방이 이 집구조가 전부 세 개였어요."

부기옥 / 외가친척

"법정스님이 하신 말씀이 많이 가지고 있으면 득이 안 된다. 그것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는 동안 어린 스님의 손에선 책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법정스님이 학교 다니다가 일요일이나 방학 때 오시면 매표소 방에서 책을 보시면서 거기서 생활했었죠. 항시 책이 안 떨어졌어요. 그래서 (책을) 보다가도 일이 바쁘고 또는 손님이 많으면 도와주고" (임준문)

 

여객선을 운행하던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부둣가에 나가 일을 거들기도 했습니다.

 

임준문 / 임해수산 대표

"부두에 접안을 하려니까 둘이 으샤! 으쌰! 하고 나는 뒤에서 하고 법정스님, 재철이 형님은 앞에서 힘내자! 그래야 거스른다! 으샤! 으샤! 그래서 겨울에 추울 때도 땀이 줄줄 날 때가 있어요. 그렇게 힘차게"

 

대학시절 어려운 주머니 사정에도 책에 대해서만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복난 / 83세, 사촌누나

"검정 타이어 고무신 있죠? 옛날에 그 고무신 신고 대학교 4학년 까지 다닌 사람이예요. 그리고 돈이 한푼이라도 시골에서 올라오든지 자기 손에 돈 한 푼만 가면 책 그러니까 출가하고 나서 대성동 그 집에 살 때 방 안에서 나온 것이 책 밖에는 없었어."

 

 

대학 4학년 방안 가득 책을 남기고 스님은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출가 당시 책을 두고 가는 것에 대한 법민으로 사흘간 잠을 못 이루었다고 스님은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신발값을 아껴 책을 읽던 청년은 훗날 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해 주는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4월 28일.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순천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의 49재가 열렸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만여 명의 추모객들이 절 마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법정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그냥 잔잔한 연못, 잔잔해서 항상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손미연 씨)

"옛날 부처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차선 씨)

 

입적 후 7주가 지나도록 신도들의 슬픔은 아직 가시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떠났지만 삶과 죽음으로 보여준 무소유는 중생들의 마음에 큰 등불로 남았습니다.

 

위재춘 / 40년 지기 친구

"맑았죠. 기분이, 마음이 고양되고 스님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스승과 제자가 같이 있으면 그 제자가 스승과 같은 수준에 이른대요. 그러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요? 저 같은 속인이 스님과 같은 레벨에 섰으니 너무 행복했죠. 함께 있는 자체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상좌들도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각자의 자리에서 수행하고 참선하며 스님의 큰 뜻을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관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

"마음을 놓아 버리면 안 됩니다. 마음을 잡고 있어야 해. 조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올 수 없고......"

 

각자 자신의 마음 속 스님을 떠나보내며 슬픔을 정리하는 날 조계산 자락엔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정혜스님

"큰스님께서 감로수를 내려주셔서 화개골이나 우리 모든 사하대지 초목총림이 이 감로수를 잘 받아들여서 꽃을 피우게 되겠죠."

 

스님 수행의 고향 불일암 가는 오솔길도 비에 젖었습니다. 49재가 끝난 뒤 수목장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의 유골 중 일부는 암자 앞 후박나무 아래에 뿌려졌습니다. 스님이 불일암을 짓고 처음 심었던 나무입니다.

 

덕조스님 / 법정스님의 상좌

"(유골이 뿌려진 나무는) 스님이 굉장히 아끼고 사랑했던 나무, 여름이면 잎사귀가 굉장히 커요. 비가 오면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빗소리 이 나무를 통해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나무입니다."

 

그날도 아침부터 곧 비가 쏟아질 듯 날이 잔뜩 흐렸습니다. 꼭 1년 전 오늘 부처님 오신 날 가사 장삼을 차려 입은 스님이 법문을 하기 위해 행지실 문을 나섰습니다. 평소 언론 노출을 싫어하시는 것을 알지만 폐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에 많은 언론사들이 길상사로 모여들었습니다. 스님은 이날도 심한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부처님 오신날 법회를 위해 대중과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한 달 전에 본 법회보다 스님의 상태는 더 악화돼 보였습니다.

 

"절에 다닌다고 해서 불자일 수 있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간순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에 따라서 진정한 불자일 수도 있고, 사이비 불자일 수도 있습니다. 괜히 불필요한 말들, 이말 듣고 저리 옮기고, 저 말 듣고 이리 옮기고 전혀 자기 신앙생활과 상관 없는 이런 존재들이 절이고 교회고 무수히 있어요. 물론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도 뿐만 아니고"

 

스님의 칼칼한 성정은 병중에도 여전했습니다. 법문이 끝나갈 무렵 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라고 말씀하셨던 법정스님. 행복은 살아 있는 우리들이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있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시라는 말로 끝난 이 날의 법문. 스님의 마지막 당부처럼 여러분 모두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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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주고 가신 법정스님.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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