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속에 추억을 담다

[스크랩] 오현명씨가 밝힌 가곡 ‘명태’와의 인연

schubert 2009. 6. 28. 23:34
예술의 전당(한국가곡) 2집 ... - 명태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동아일보>에서 퍼옴

24일 타계 성악가

 

오현명씨가 밝힌 가곡

‘명태’와의 인연



“악보 보고 ‘노래가 뭐 이래’ 했는데…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


은관문화훈장 추서



“‘명태’는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곡이 되었다.

‘명태’ 하면 오현명, 오현명 하면 ‘명태’가 바로 이어질 정도로

나의 대명사 격인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24일 별세한 ‘한국 가곡의 거목’
오현명(사진)의 대표곡 ‘명태’에 얽힌 일화다.
 
그가 굵은 저음으로 너털웃음을 곁들여 부르는 ‘명태’에는
우리네 삶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현명은 25일 나온 유고작
‘노래 나그네 오현명 자서전-다시 부르고 싶은 노래’
(세일음악문화재단)에서 ‘명태’와의 인연을 소상히 적었다.


6·25전쟁 당시 오현명이 대구에서
공군정훈음악대원으로 활동할 때
유엔군 제7군단의 연락장교 변훈이 찾아왔다.
 
그는 종이뭉치를 던져주고는 황급히 돌아가면서 말했다.
“내가 쓴 곡인데 한 번 봐줘.
그중에 ‘명태’라는 곡이 있는데,
그건 특히 자네를 위해 쓴 것이니까 언제 기회 있으면 불러 봐.”


“‘명태’ 악보를 보니,
그게 아무래도 노래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야, 이거 무슨 노래가 이래?’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노래의 멜로디 같지도 않은 멜로디가
가사와 함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정겹게 느껴지게 되었다.”


부산의 해군정훈음악대로 옮긴 그는
1952년 늦가을 부산의 한 극장에서 열린
‘한국 가곡의 밤’ 무대에서 ‘명태’를 처음 불렀다.
 
홍난파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 익숙했던 음악가와 청중은
이 노래를 듣고 ‘노래 같지도 않은 엉터리’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유명 음악평론가 이성삼은 ‘그것을 노래라고 작곡을 했느냐? 그게 무슨 가곡이냐?’라는 취지의 혹평을 신문에 싣기도 했다.


“내가 그 노래를 불렀던 초기에는
청중이 ‘무슨 노래가 저런가?’
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아∼’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웃으면서 관심을 갖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명태’는
1964년 10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대학생을 위한 대음악회’에서 빛을 봤다.
앙코르를 요청하는 청중의 박수가 끝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나 자신이 변훈의 ‘명태’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 노래에 깃들어 있는 한국적인 익살과
한숨 섞인 자조와 재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곡에서는
젊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들의 자조 섞인 신세를
명태에 비유한 한탄조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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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자 변훈
焄 
1926~2000.8.29
 
 

원래 이 곡은 6.25사변중 국군으로 전투중이던 변훈님이

쓴 곡에 종군기자로 있던 양명문님이 가사를 쓴

당시로선 혁신적인 곡이였지만
1952년 초연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자유로울수 없는 젊은 영혼들을
명태에 비유해 역설적으로 신세를 한탄한 가곡 명태

성악가 오현명이 구성지게 불러 심금을 울렸다.


1926년 함경남도 함흥 태생의  변훈(1926∼2000)은
주포르투갈 대사 등을 역임한 외교관 출신 작곡가로
함남중학교를 거쳐 연희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53년 외교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81년 5월 주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28년간의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또 작곡가로는 1947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금잔디」

윤동주 작시의 「무서운 시간」, 시인 김광섭의「차라리 손목잡고 죽으리」

등을 작곡했다.

특히 바리톤 오현명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명태」(양명문 작시)는 해학적인 가사 민속적인 가락으로
한국 가곡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변 씨는 이밖에 김광섭 작시의 「나는야 간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정공채의 「갈매기 우는구나」,
조병화의 「낙엽끼리 산다」,등의 작품을 남겼다.

 

 

 


양명문


 

1913.11.1~1985.11.21

 

호 자문(). 평양 출생.

1942년 일본 도쿄센슈[]대학 법학부를 졸업.
1939년 27편의 시를 수록한 처녀시집

《화수원()》을 발간하여 시단에 등단

1·4후퇴 때 월남하여 종군작가로 활약하였다.

 

1960∼1965년 이화여자대학 교수,

1965∼1979년 국제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81∼1985년 세종대학 초청교수를 지냈다.

작품에는 《송가()》《푸른 전설》《화성인》《지구촌》,
시선집으로 《이목구비》《묵시록》, 장편 서사시《원효》 등 다수가 있다.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오현명

吳鉉明
1924 10 10-2009. 6. 24.

 

吳鉉明씨가 한국 歌曲史 최고의 성악가로 뽑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생애 가 80년 한국 가곡사 혹은 民族史(민족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만주땅 에서 출생한 그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자라다

6세 때 현제명 성악곡집을 듣고 음악적 감화를 받았다.

 

형의 친구인 작곡 가 임원식씨로부터 목소리 좋다는 말을 듣고

中 1때 교회 무대에 처음 섰고「보리밭 」의 작곡가 윤용하가 만든

조선 합창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징병을 당해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거기서 조국해방을 맞이하였고,

만주로 되돌아가던 중 38선이 막혀 서울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 극적 으로 현제명씨를 만났고

그 밑에서 일하다 가 경성음악학교 장학생으로 입학,

평생의 스승 김형로씨를 만났다.


6·25 때는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북되던 중

탈출하여 국군 정훈음악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일생의 레퍼토리가 된 가곡「명태」를 만났다.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을 때,

연락 장교로 있던 작곡가 변훈씨가

날 위해 만들었다며 던져주고 간 악보뭉치 속에

명태 」가 있었지요.

멜로디보다 가사 위주로 가는 생소한 방식,

해학적인 가사가 좋아 발표했다가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어요.

작곡가가 낙담해 進路를 바꾸기까지 했으니까요.

1970년에 다시 불렀다가 유명해져서 어딜 가나

오현명 - 명태

명태 -오현명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출처 : 맹꽁이의 찬양
글쓴이 : 오소운 맹꽁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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