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ydn - 교향곡 제45번 "고별" 4악장 Symphony No.45 in F# minor'Abschiedssymphonie (Farewell)'
Daniel Barenboim & Wiener Phil 2009 신년음악회
4악장 Presto -Adagio
1772년 작. 후원자인 에스테르하지공(公)과 함께 공의 이궁에 오래 머무르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악단원들의 심정을 에스테르하지공이 헤아리도록 하기 위하여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악장에서 자신이 맡은 연주를 모두 마친 사람부터 한 사람씩 불을 끄고 조용히 퇴장함으로써 사라지듯이 곡이 끝나는 이색적인 교향곡이다. 이로 해서 공이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여 '고별'이란 곡명이 붙었다고 한다.
궁정악단원의 시위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
하이든이 쓴 교향곡의 수는 엄청나게 많아서 번호가 붙은 것이 1백4곡, 그밖에 3곡이 더 있어 현재는 총 1백7곡이 정설로 되어 있다. 개중에는 딴 사람이 하이든의 이름을 빌려 출판한 위작도 더러 있다고 한다. 그 당시는 판권도 느슨했던 시대였고, 또 마음씨 좋은 하이든이 자기 명의를 도용하는 것을 묵인했기에 그렇게 되었으리라는 설도 있다.
하여간 그의 이름으로 된 교향곡의 수가 하도 많다보니 교향곡 번호만으로는 곡이 구별되지 않았을 뿐더러, 교향곡에 무슨 별명이 붙어야 악보 출판도 잘 된다는 인식이 있었던 시대였기에, 주로 출판업자 등에 의해 별명이 지어지곤 했다. 오늘날에도 그때 지어진 별명이 통용 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악보 출판사에서는 아직 별명이 없는 하이든의 교향곡에 어울리는 그럴싸안 닉네임을 공모하는 경우까지 있다.
하이든의 교향곡 중 '호른 신호', '슬픔', '마리아 테레지아', '수난', '사냥', '왕비', '경악', '옥스포드', '군대', '사계', '큰북 연타', '런던' 등은 그나마 점잖은 별명이다. 좀더 재미있는 닉네임으로는 '곰', '암탉', '멍청이', '교장선생', '철학자', '화재' 등이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하이든 특유의 익살이 엿보인다.
그의 교향곡 제45번은 <고별 교향곡>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어 유명한데 내력 또한 이채롭다.
하이든이 출사하고 있던 에스테르하지의 니콜라우스 공은 1766년 노이지트라 호숫가의 풍광이 수려한 곳에,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호화판 궁전을 짓고 '에스테르하지 궁'이라고 명명했다. 처음에는 그 거성이 채 완성되지 않아 거처가 비좁아 관현악단의 단원이나 하인들은 가족들을 떼어 놓고 홀몸으로 와서 지내야 했다. 특히 갓 결혼한 악사들은 음악도 좋지만 애처와 떨어져 있자니 죽을 지경이었다. 1772년 여름에 통상 그 곳에 머물러야 했으므로 견디다 못한 악사들은 악장 하이든에게 이런 불편한 생활을 해소할 길이 없겠느냐고 건의해 왔다. 위트가 풍부한 하이든은 묘책을 생각해 냈다.
며칠 후 하이든은 새로 작곡한 교향곡의 발표연주회를 가졌다. 시종 흐뭇한 미소를 띤 채 음악을 감상하던 니콜라우스 공은 곡의 마지막이 가까워지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연주를 하던 악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연주를 끝내더니 악기를 치우고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는 퇴장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에는 불과 몇 사람만이 남아서 가냘프게 연주를 끝냈다. 연주를 들은 니콜라우스 공이 악단의 우의를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튿날 단원들의 애절한 소원대로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으리까. 휘황한 조명 장치가 완비된 현재의 콘서트 홀에서도 이 곡을 연주할 때만은 그 때처럼 전기조명을 다 끄고 어두운 촛불을 각 보면대의 촛대에 꽂아 놓고 연주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 곡으로 말미암은 웃지 못할, 아니 웃어도 괜찮은 '믿거나 말거나'의 일화가 또 한가지 때는 19세기 중엽, 오스트리아의 온천 휴양지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날 저녁의 콘서트에 모인 청중은 거의가 벼슬아치 나으리들이거나 아니면 목에 힘깨나 주는 돈 많은 부호 부부들이었다. 마지막 연주 곡목인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 종악장 후반이 이르니, 프레스토로 빠르던 곡이 안단테로 템포가 떨어지고 관례대로 악사들이 한 사람씩 자리를 뜨고 밖으로 퇴장했다. 어느 백작 부인쯤으로 보이는 비계덩어리 귀부인이 옆에 앉은 남편에게 귓속말로 말하였다.
"어머, 저 사람들 온천물을 생으로 마시고 죄다 설사 났나봐요!"
글출처 : 작성자 하늘지기
교향곡 제45번 "고별" Symphony No.45 in F# minor'Abschiedssymphonie (Farewell)'
하이든을 고용하엿던 에스테르하지의 니콜라우스 후작은 1766년에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화려한 궁성을 노이지트라 호수가 바라다 보이는 아름다운 장소에 건축햇다.
이 성은 에스테르하지 궁으로 불렸으며 처음에는 비좁은 관게로 관현악단의 연주자나 하힌들은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다.
단원들 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된 것은 악장 하이든을 포함한 겨우 4명뿐이였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봉금을 더 주게 되어 있었으나 그 대신에 많은 단원들은 여름동안 가족과 떨어져 에스테르하지 궁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1772년 보통 머무는 6개월보다 2개월이나 더 머물렀다. 그 일로 단원들은 하이든에게 이 불편한 생활을 해소할 수 있도록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든은 한 가지 방버을 생각해내서, 곡의 마지막에 연주하는 단원이 한 명씩 연주를 끝내고 악기를 챙겨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퇴장해서 아주 소수만 남아 조용하게 연주를 이어가는 교향곡을 작곡해서 단원들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고별 교향곡> 이 만들어졌으며, 조성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외로운 f# 단조가 선택되었다.
이 곡이 실제로 후작앞에서 연주되자 니콜라우스 후작은 즉시 그 뜻을 깨닫고 다음날 단원 전원에게 휴가를 주었다.
이 곡에 주어진 <고별>이라는 호칭은 18세기 말경에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곡은 일반적인 4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 악장만 빠른 마지막 곡 다으멩 단원이 하나씩 퇴장하는 안단테가 붙어 있다.
작곡 - 1772년 (자필악보에 의함)
편성 - 오보에2, 파곳(솔로 파트가 제4악장의아다지오부에 있다.) 호른2, 바이올린2부, 비올라.
4악장 Presto -Adagio
프레스토 f#단조. 2/2박자. 소나타형식. 마지막 악장은 두개의 부분으로 되어있다.
그중 제1부분은 빠른 템포의 교향곡의 일반적인 마침곡이다. 이 프레스토의 피날레는 소나타 형식으로, 처음에 f#단조의 제1주제가 나타나고 짧은 경과구 후에 제2주제가 A장조로 나오는데 선율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구조이다.
일반적인 형태대로 코데타가 이어진 후 제1주제 중심의 발전부에 이어서 제시부 전체를 반복화는 재현부가 된다. 여기에서 제2주제 이하는 으뜸조인 f#단조로 조바꿈되어 마지막은 딸림음으로 반종지하고, 페르마타 휴지부를 거쳐 아다지오로 들어간다.
아자디조 A장조. 3/8박자. 마지막 부가부분은 앞의 프레스토가 f#단조의 딸림음으로 종지한 뒤를 이어 곧바로 병행조인 A장조로 시작된다.
이 A장조 부분은 작은 3부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F#장조의 코다가 이어진다.
A장조의 주요부분의 주제는 처음 31마디 동안은 모든 악기가 참가하지만 이후 제1오보에와 E조의 제2호른이 종료한다.
초연할 때에는 하이든의 지시에 따라 보면대의 촛불을 끄고 악기를 갖고 퇴장했다고 한다.
이후 10마디의 중간 악절이 있은 후 재현부로 이어지는데, 주제 재현의 6마디에서는 파곳이 종료하고 그 다음 7마디 후에는 남아 있던 제2오보에가 끝나고 다음 마디에서 A조의 제1호른이 종료한다.
제2부분의 마지막에는 콘트라베이스가 종료한다. 이어서 F#장조의 코다로 들어가는데 여기에서는 4부로 나누어진 바이올린과 비올라와 첼로의 현악만 남게 된다. 이 중에서 첼로는 코다의 10번째 마디에서 종료하며, 8마디 후에는 2부로 나누어진 두 명의 제2바이올린이 종료한다.
비올라는 다시 8마디 후에 퇴장하고 마지막 14마디는 두 명의 제1바이올린만 조용히 연주를 계속하며 사라지듯이 곡이 끝난다.
[출처] 하이든 교향곡 45번 '고별'|작성자 아침햇살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1732년 오스트리아 로라우 대장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3형제는 맏이였다는데요, 그 형제들 모두 음악적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고 해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인 재능을 볼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대로 계속 살았다면 지금의 우리는 하이든의 음악을 못만났겠지요..ㅎ
그가 6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자 하이든의 친척뻘 되시는 분이 하이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후로 친척은 하이든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하이든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게 됩니다.
친척의 집은 하인부르크였는데 그 곳에서 그는 여러 악기 연주법과 노래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후 2년 뒤 그는 빈 소재의 교회에 오르간을 연주하는 사람의 눈에 띄게 됩니다. 하이든의 목소리를 듣고 그는 하이든을 성당 합창단으로 넣어줍니다.
그곳에서 그는 10년 동안 합창단으로 노래를 부르며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이 때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하이든의 목소리가 너무나 탐이 났던 이 연주자는 하이든을 카스트라토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접 하이든의 아버지를 만나서 설득하려 했지만 하이든의 아버지는 펄쩍 뛰시며 반대를 하셨다고 해요. 진짜 카스트라토가 되었으면 성악가로서 이름을 날리셨을까요..;;;
아무튼, 그가 거세를 하지 않아 그는 17살이 되자 목소리가 굵어집니다.
그래서 하이든은 합창단을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이제 어떻게 먹고 살지 막막하기만 했던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이 때 그에게 또다시 행운이 찾아 옵니다.
그 행운은 바로 귀족의 자녀를 가르치는 니콜라 포르포라를 만난 것이죠. 하이든은 그의 반주자가 되어 여러 귀족들과 만나게 되면서 재능 있는 젊은 음악가로 인정 받게 됩니다.
하이든이 29세가 되던 해에 그는 1761년 헝가리의 후작인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부악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이곳에서 31년동안이나 일을 하는데요,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는 만큼의 열정을 그대로 다 쏟아부어도 되었을 만큼 많은 후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비용에서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음악을 하던 그렇게 심하게 간섭이 없었습니다.
물론 귀족의 밑에 고용된 입장이라 아주 압박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그 어떤 음악가들 보다는 자유로웠다는 것이죠. 그는 이곳에서 60세가 될때까지 100곡 이상의 교향곡과 70 여곡의 현악 4중주 곡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또 재밌는 일화 하나가 있는데요,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후작 밑에서 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이든의 음악적 활동은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악단의 단원들 또한 바빠졌습니다.
한 두번도 아니고 계속 바쁜 나날이 반복 되자 단원들은 자신의 가족도 만날 수 없는 스케쥴에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알아챈 하이든은 그들을 위해 교향곡을 작곡 하는데요,
이 때 작곡한 곡이 바로 "고별" 교향곡 입니다.
이 고별 교향곡이 처음 연주 되었을 당시 연주자들은 열심히 교향곡을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정도 막바지에 이르자 단원들이 하나씩 촛불을 끄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후작은 그 뜻을 알아차렸고 단원들에게 바로 장기 휴가를 내어 줬다 합니다. (눈치도 빠르시지요...-ㅅ-)
이처럼 하이든은 남을 잘 배려 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이라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파파 하이든" 이라는 별명을 붙어 주었습니다.
에스테르하지 후작 밑에서 열심히 창작 활동을 하던 하이든은 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부인이 음악을 싫어 한다는 이유로 악단을 해산 시키는 바람에 다시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갑니다.(이 때도 치맛바람이....) 그렇지만 그의 명성을 하늘을 찌를 듯 했기 때문에 베토벤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중에서 영국 바이올린 연주자인 잘로몬이 그를 영국으로 초대 하였는데 그는 그 청을 받아들여 영국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12개의 교향곡을 작곡 하는데 그 교향곡 이름이 "잘로몬 교향곡"입니다.
하이든은 그 곳에서 아주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영국인들은 하이든도 헨델 처럼 귀화 하기를 바랬지만 하이든은 말했습니다.
"영국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으나, 단 하나 나의 모국 오스트리아가 없다."
이 영국에서의 생활 중에 그는 헨델의 오라토리오"메시아"를 보게 됩니다.
이 오라토리오에 상당한 충격과 감명을 받은 하이든은 "천지창조"와 "사계"라는 오라토리오를 만듭니다.
특히 천지창조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영향이 아주 짙다고 합니다.
곡의 형식이나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는 영국의 국가 를 듣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서 오스트리아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이 국가는 지금은 독일의 국가로 쓰이고 있다고 해요. (어째서지...)
그 외에도 하이든이 작곡한 국가는 꽤 된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노년에 아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다 77세의 나이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을 때 보다 더 지독한 일을 죽어서 당했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1809년 숨을 거둔 후에 푼트슈트르머 묘지에 안장이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 니콜라우스2세 에스테르하지 후작에 희망대로 그의 시신은 아이젠슈타트로 이장이 되는데
그 때 하이든의 두개골이 없어졌습니다.
범인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서기인 요제프 로젠바움과 형무소 소장인 요한 페터였습니다.
이들은 골상학의 신봉자여서 ( 두골의 형상에서 사람의 성격을 비롯한 심적 특성 및 운명등을 추정하는 학문) 하이든과 같은 천재 음악가의 골을 훔쳐 이론에 적용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범인은 밝혀졌지만 두개골의 행방은 묘연했고 니콜라우스2세 후작은 열심히 사건을 파헤친 결과
하이든의 두개골을 찾아내 시신에 붙여 베르크 성당 지하에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두개골은 진짜가 아니고, 진짜는 로젠바움과 페터가 죽은 후 여러 손을 거쳐서
"빈 악우회"의 소유가 되어 유리관 속에서 전시 되어져 있었습니다.
20c초에 에스테르하지의 후손인 후작 파울은 하이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베르크 성당 북쪽 탑 아래에 그의 영묘를 만들었습니다.
그 후 1954년에 하이든의 두개골은 아이젠슈타트로 오게 되었고, 비로소 그는 안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천재는 죽어서도 힘든거군요...;;
언제나 온화하고 모범적이었던 하이든.
그는 교향곡이 고전주의의 이상인 균형과 조화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교향곡을 좋아하고 많이 작곡했다고 합니다.
하이든의 음악세계를 알려면 교향곡 한두개 쯤은 필수로 들어봐야 할것 같네요.^^
[출처] 여덞번째 상자 속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작성자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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