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ce

[스크랩] 타이스 명상곡 (Thais Meditation)

schubert 2007. 11. 24. 10:09

  

타이스 명상곡  (Thais Meditation)

Jules E. F. Massenet, 1842~1912

Meditation De Thais / Violin Anne-Sophie Mutter
Wiener Philhamoniker , James Levine cond.
Meditation De Thais / Pan Flute Gheorghe Zamfir



Meditation De Thais / Trumpet Mauris



Meditation De Thais / Trombone 



Meditation De Thais / Flute



Meditation De Thais / Guitar


 

 

 

(Jules Massenet, 1842~1912)

 

 

  

마스네 (Jules Massenet)

원어명  Jules Emile Frédéric Massenet
국   적 :  프랑스
직   업 :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출생지 :  프랑스 리옹 근처 몽토
활동년도 :  1842년 5월 12일 (프랑스 생에티엔)

                   - 1912년 8월 13일 (파리)

 

서정성, 관능성, 극적 적응성과 때때로 감상성을 지닌 음악으로 유명하다. 철 기제조업자의 12형제 중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마스네는 자기의 이름을 싫어하여 그 머리글자만 사용하였다. 1851년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는데, 양친이 파리를 떠나 샹베리로 주거를 옮겼기 때문에 1856년부터 1857년까지의 1학년은 휴학해야 했다. 1853년인 11세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 앙브루아즈 토마에게 작곡을 배웠다. 1858년에는 피아니스트로서, 특히 앙주와 투르네에서 몇 차례 음악회에 출연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가수의 반주를 하거나 짐나즈의 관현악단에서 트라이앵글을, 이어서 카페 샤를르나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팀파니를 담당하기도 했다. 1859년에 1등상을 받고, 1863년 칸타타 〈다비드 리초, David Rizzio〉로 로마 대상을 받았다.

 

르 베르(화성), 사바르 M. G. Savard(대위법), A. 토마(작곡)에게 배운 뒤 1863년 푸가에서 1등상을 획득함과 동시에 칸타타 다비드 리치오 David Rizzio로 로마 대상을 획득했다. 이것은 베를리오즈의 의견이 콩쿠르의 결과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61년부터 마스네는 작곡 활동을 시작하여 마이어베어의 “프로에르멜의 허락”에 바탕을 둔 연주회용 대환상곡 Grande fantaisie de concert sur le “Pardon de Ploërmel” de Meyerbeer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요청에 따라서 1900년에 파기되었다.

 

마 스네는 2년간 메디치장에 체재하면서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제출해야 할 작품을 썼다(연주회용 대서곡 Grande ouverture de concert과 레퀴엠, 그리고 뒤에 오라토리오 막달라 마리아 MarieMagdeleine가 되는 오페라의 단편 등). 또한 빅토르 위고의 에스메랄다 Esmeralda에 의한 오페라도 기획했다. 리스트의 제자였던 생트 마리 sainte Marie와 알게 된 것은 로마에서였으며, 그는 프랑스로 귀국한 후 그녀와 결혼했다. 또한 받은 상금으로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를 여행했고, 그곳에서 받은 감명으로 나폴리의 풍경 Scenes napolitaines(1864)과 헝가리의 풍경 Scenes hongroises(1871)을 작곡했다. 그리고 1866년부터 많은 그의 작품이 파리에서 초연되게 되었다. 서곡 외에 주목되는 것은 폼페이아 Pompeia이며, 그 일부는 부수음악 복수의 세 여신들 Érinnyes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2개의 환상곡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다.

 

1867 년 오페라 〈La Grand' Tante〉를 무대에 올리면서부터 오페라와 부수 음악 작곡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 작품은 1867년 4월에 상연되어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의 오케스트라 악보는 바장의 돈 세자르 Don César de Bazan의 악보와 마찬가지로 1887년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화제로 일부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원되지 않았다. 그러나 피아노와 노래의 악보에서 이 최초의 오페라 작품이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것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3등상을 획득한 어떤 콩쿠르를 위하여 작곡한 오페라 튈레 왕의 술잔 La Coupe du roi de Thulé은 현재까지 전해져 오지는 않지만, 그 음악은 계속하여 작곡된 5개의 오페라 작품 속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다.

 

24 편의 오페라는 우아하며 철저하게 프랑스적인 선율 양식이 특징이다. 그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마농 Manon〉(1884, 앙투안 프랑수아 프레보의 소설에서 따옴)은 감성적인 선율과 능란한 성격 구현 기법이 특징이며 특히 주도적인 주제나 동기로 주인공들의 등장을 나타내거나 감정을 묘사한다. 레치타티보 부분에서는 간단한 관현악 반주에 일상적인 말을 사용하는 특이한 수법을 쓰고 있다. 그밖에도 〈노트르담의 음유시인 Le Jongleur de Notre-Dame〉(1902)·〈베르터 Werther〉(1902)·〈타이스 Thais〉(1894) 등이 가장 성공을 거둔 걸작품들이다. 〈타이스〉에 나오는 유명한 '명상곡'은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곡으로 바이올린 명곡이 되었다.

 

마 스네의 오페라를 보면 당대에 유행했던 오페라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르 시드 Le Cid〉(1885)는 전형적인 프랑스의 그랑 오페라이며, 〈라오르의 왕 Le Roi de Lahore〉(1877)은 동양에 대한 이국적 취미를 보여준다. 〈에스클라몽드 Esclarmonde〉(1889)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으며, 〈나바르의 여인 La Navarraise〉(1894)은 19세기말 사실주의 양식인 베리스모(verismo)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에로디아드 Hérodiade〉(1881)와 〈돈키호테 Don Quichotte〉(1910)도 마스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부수 음악으로 르콩트 드 릴의 희극 〈복수의 여신들 Les Érin-nyes〉(1873)에 붙인 곡이 유명하며 이 작품에 자주 연주되는 노래 〈비가 Elégie〉가 들어 있다. 1873년 작곡된 오라토리오 〈마리아 막달레나 Marie-Magdeleine〉는 후에 오페라로 공연된 것으로 마스네 음악에서 흔히 발견되는 종교적 감정과 에로티시즘이 혼합되어 있다. 그밖에도 200곡 이상의 가곡, 1곡의 피아노 협주곡, 다수의 관현악 모음곡을 썼다.

 

1878 년부터 파리 음악원 작곡교수로 재직했으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수직을 사임한 후 마스네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었으며 그 최초의 성과가 된 것이 사포 Sapho였다. 1896년 여름에 만들어진 사포는 1897년 11월부터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상연되었고 알퐁스 도데의 다음과 같은 목표를 예상하여 풍차간 소식 Les Lettres de mon moulin의 장면을 덧붙여서 1909년에 다시 상연되었다. 1897년에는 또 12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연탄곡집 지난 해 Année passeé와 첼로 독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이 작곡되었다. 별로 종교적이지 않은 마스네가 직접 불가타(라틴어 역 성서)의 텍스트를 오라토리오 약속의 땅 La Terre promise으로 번안한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이 작품은 1897년과 1899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한 편 노틀담의 종글뢰르 Le Jongleur de NotreDame의 주제는 마스네의 사적인 신뢰에 적합한 것이었다. 이 작품을 통하여 마스네 고유의 시적 상념 이상으로 감취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현저해지고 있던 그레고리오 성가와 중세 음악에의 흥미의 소생이다. 노틀담의 종글뢰르와 같은 무렵에 만들어져 1902년에 초연된 피아노 협주곡의 끝곡에는 옛날의 곡상이 다시 사용되고 있는데, 아다지오에는 마스네 만년의 작품의 특징인 가을을 연상케 하는 화성적 색채가 나타나 있다. 마스네는 같은 시기에 로마 Roma를 착수하였고, 아리안 Ariane(1905, 초연 1906), 바커스 Bacchus(1908, 초연 1909), 로마(190210, 초연 1912), 클레오파트라 Cléopatre(191112, 초연 1914)와 같은 작품들도 잘 마무리 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말하듯이 영감이 부족한 것이 아닌데도 성공은 미미했다.

 

1903 년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스네의 조언자이며 프랑시스 드 크루와세(Francis de Croisset)의 후원자였던 실비 샌더슨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며칠 사이에 씌어졌다고 하는 천사 셰뤼뱅 Chérubin은 특히 마스네의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혁명 때의 에피소드를 다룬 테레즈 Thérese(190506, 초연 1907)는 천사 셰뤼뱅만큼 강렬하며, 자기 자신을 변혁해 가는 마스네의 능력을 보충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에 반해서 음악에 의한 고귀한 농담인 파뉘르주 Panurge(1911, 초연 1913)는 아무런 인상도 남겨놓지 않았으나, 1910년에 샬리아핀에 의해서 초연된 돈 키호테 Don Quichotte(1909)는 마스네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작의 하나이다. 그것은 대본의 뛰어난 구성에 기인하고 있는데, 반면 어떤 극적 주고받음의 허술함이 마스네에 대해서 사람들이 흔히 비난하는 빈약함의 원인이 되기도 했었던 만큼 더욱 성공적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나 음악과 극을 잘 융합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던 마스네는 내면적인 질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 래서 처음부터 독창적인 오페라의 어법을 찾아내는 비결을 몸에 익히고, 광범한 이해와 가급적 충실한 상연을 보증하는 유일한 것인, 단순함의 추구에 거의 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있던 이 작곡가는 오페라 작자로서의 장인성의 희생이 될 때가 종종 있었다. 그에게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장인성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그는 자기의 감성보다도 그 기교적인 우수성에서 재능이라 할 만한 것을 이끌어 내고 있었던 것 같다.

 

제 자로는 알프레드 브뤼노와 귀스타브 샤르팡티에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프랑스 사실주의 오페라를 대표한다. 아울러 20세기 프랑스의 주요작곡가 플로랑 슈미트, 가브리엘 피에르네, 샤를 케슐랭을 배출했다. 자서전 〈나의 회상, Mes Souvenirs〉(1912)을 남겼다.

 

 

[ 마스네의 연표 ]

 

1842년  5월 12일 프랑스 생에티엔 1철기제조업자의 아들로 출생.
1851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1858년  피아니스트로서, 특히 앙주와 투르네에서 몇 차례 음악회에 출연.
1861년  작곡 활동을 시작.
           <대환상곡>을 출판.
1864년  <나폴리의 풍경> 작곡.
1867년  4월 오페라 상연되어 성공을 거둠.
1863년  푸가에서 1등상을 획득.
            칸타타 <다비드 리치오>로 로마 대상을 획득.
1871년  <헝가리의 풍경> 작곡.
1873년  작곡된 오라토리오 <마리아 막달레나>는 후에 오페라로 공연.
1878년  파리 음악원 작곡교수로 재직.
1887년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화제로 일부 소실
1896년  여름에 <사포> 작곡.
1897년  11월부터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사포>상연.
1912년  8월 13일 파리에서 사망.

                                
출처 : 우석의 음악살롱
글쓴이 : 우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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