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들의 길 - 임보
언덕 위에 서면 바람들의 길이 보였다
바람들도 빛깔이 있었다
투명하지만 색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빛깔이었다
감귤 밭을 넘어온 남풍은 노오란 빛
전나무 숲 속을 빠져나온 북풍은 청록빛
쪽빛 바다를 밟고 온 서풍은 남빛이었다
바람들은 들판에서 서로 만나
오색 실타래들이 꼬이듯 몸을 비비며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바람의 실가닥은 풀리어
초가집 사립문 틈으로 슬며시 스며들기도 하고
어떤 가닥은 잠자는 송아지 코 속으로 조용히 빨려 들기도 했다
문득 꺽꺽꺽 장끼 한 마리 숲을 깨고 솟아오르자
황. 록. 청. 백. 홍 오색 바람들이 소용돌이치며 몰려와
눈부신 날개를 허공에 만들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이 어찌된 일인가
감귤 밭을 향해서는 다시 황색 바람이
쪽빛 바다쪽으론 다시 남색 바람이
전나무 숲으론 다시 청록색 바람들이
떼를 지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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