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z

[스크랩]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모든 것 (펌)

schubert 2011. 1. 21. 03:40

비엔나신년음악회, 그 멋진음악회의 모두

비엔나’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 음악의 도시인만큼, 배출된 유명한 음악가 베토벤, 모차르트?

아님,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음악저널’의 독자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여기서 갑자기 소시지볶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스갯소리로 요리잡지의 구독을 권장한다. 

아무튼 1월의 비엔나, 벌써 눈치 빠른 클래식 애호가들은 알아차렸으리라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 시간대 연주되는 음악회를 방송과 TV를 통하여 가장 많이 시청하는 프로그램, 바로 말할 필요도 없이 ‘비엔나신년음악회’일 것이다.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실황은 전 세계 44개국에 동시에 중계되어, 약 10억의 인구가 시청한다. 비엔나 신년음악회가 전 세계에 실황 중계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부터였다. 사실 비엔나 필하모닉이 벌어들이는 방송중계료만 해도 대단하며, 연주회가 끝나면 실황을 CD 또는 DVD로 만들어 판매한다. 이것들은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


이번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2011년 1월 1일 오전 11시 15분 비엔나 악우회관(Wiener Musikverein)에서 열린다. 비엔나 필하모닉의 지휘는 오스트리아 린츠(Linz) 출신의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Möst)가 맡는데, 오랜만에 오스트리아 사람이 지휘를 맡게 되어 비엔나 사람들은 한껏 기분이 좋아있다. 1960년 8월 16일 생으로 2010년 9월부터 비엔나 국립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역임한 그는, 이번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 지휘를 맡게 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linz에서 태어나 Balduin Sulzer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어린 시절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자동차 사고로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지휘공부에 모든 시간을 쏟게 된다. 그가 자동차 사고가 났었던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혹 필자들은 말하기를, 그로 인해 그의 비팅에서 나오는 훌륭한 음악들을 들을 수 있는 우리에겐 더없는 행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연주하게 될 ‘2011 비엔나 신년 음악회’는 주로 슈트라우스왕조 사람들의 작품을 연주한다. 이는 요한 슈트라우스1세(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2세(아들), 요셉 슈트라우스, 에두아르트 슈트라우스를 말한다. 

*사진/효음악회를 만든 쉔부른클래식의 권순덕 대표

*신년음악회의 프로그램 =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프로그램은 항상 요한 슈트라우스 가족의 작품이 중심이 되지만 간혹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도 추가된다. 하지만, 슈트라우스 가족 이외의 작곡가라고 해도 관례적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들의 작품에 한한다. 예를 들면 요셉 란너(Joseph Lanner), 요셉 헬메스버거(Joseph Hellmesberger),  프란츠 요셉 하이든(Franz Joseph Haydn),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칼 오토 니콜라이(Carl Otto Nicolai), 에밀 폰 레즈니체크(Emil von Reznicek),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e), 칼 미하엘 지레르(Carl Michael Ziehrer), 칼 밀뢰커(Carl Millöcker), 프란츠 레하르(Franz Lehar) 등의  작품이다.


레퍼토리는 보통 12곡 정도이므로 빨리 끝날 것 같지만, 중간 휴게 시간이 상당히 길어 보통 2시간 이상이 걸린다. 휴게시간을 이용하여 연주회장 부근에 있는 임페리얼 호텔에 가서 저녁을 먹고 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연주되는 곡목들은 통상 왈츠, 폴카, 마주르카, 행진곡들이다. 연주회 장소는 비엔나 악우회관(Wiener Musikverein)의 대연주회장(Grosser Saal), 황금홀(Goldener Saal)이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연주회장이다. 무대를 장식하는 꽃들은 매년 이탈리아의 산 레모(San Remo)가 선물로 보내는 것이며, TV로 중계될 때에는 휴게시간 이후의 제2부에선, 비엔나국립오페라극장의 발레무용수들이 등장해 왈츠나 폴카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들은 비엔나 슈타츠오퍼 발레 단원들이며, 주로 쉔부른 궁전에서 춤의 향연을 펼친다.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정규 프로그램 이외에 항상 세곡의 앙코르로 막을 내린다. 첫 번째 앙코르 곡은 빠른 템포의 폴카이다. 두 번째 앙코르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Blue Danube Waltz)이다. 앙코르 곡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관중들은 당연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인줄 알고 첫 소절이 끝날 무렵,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 앙코르 곡은 요한 슈트라우스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Radetzky March)이다. 이 곡이 연주되면, 전통적으로 관중들은 모두 음악과 함께 박수를 치며, 연주에 동참한다. 그럴 때면 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관중들을 지휘한다. 


*비엔나신년음악회의 역사=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듬해인 1939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2011년으로 72주년을 기록한다.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매년 1월 1일에 열리지만, 첫해인 1939년에만은 12월 31일에 열렸다. 또한 1939년의 음악회는 ‘신년음악회’가 아닌 ‘특별연주회’(Ausserordentiliches Konzert)라는 타이틀이었다. 그렇지만 이를 제1회 '비엔나 신년음악회'로 간주한다. 1939년 ‘특별연주회’의 지휘자는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였으며, 당시 프로그램은 순전히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작품으로만 구성되었다.


비엔나신년음악회는 예정된 프로그램이 끝나면 적어도 세곡의 앙코르 연주를 듣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지만, 제1회인 1939년의 연주회에서는 앙코르가 없었다. 그러므로 1939년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라데츠키 행진곡>이 연주되지 않았다. 앙코르가 없이 비엔나신년음악회가 진행된 것은, 1939년부터 세계2차 대전이 끝나던 해인 1945년까지 그러했다. 오스트리아의 제2의 국가라고 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 처음 레퍼토리로 포함된 것은, 아직도 전쟁 중인 1945년 1월 1일의 연주회에서였다. 그것도 앙코르 곡으로였다. '신년음악회’의 앙코르 곡으로 빠지지 않고 있는 <라데츠키 행진곡>의 연주는, 1946년부터 비롯된 전통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라데츠키 행진곡>이 1945-46년 이후, 매년 앙코르 곡으로 연주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간혹 두곡 중에 한곡이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두곡 모두가 ‘신년음악회’의 단골 앙코르 곡으로 올라서게 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말하자면, 그 이전에는 앙코르 곡으로 연주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던 것이다. 초창기부터 상당기간 동안 신년음악회를 지휘해온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무슨 생각인지 ‘무궁동’(Perpetuum mobile: 無窮動)이라는 곡을 항상 정식 프로그램에 넣었다. 사정이 있어서 ‘무궁동'이 정식 프로그램에서 빠지게 되면, 앙코르 때에 반드시 연주했다. 아마 비엔나신년음악회가 영원무궁토록 발전하기를 바라서였던 것 같다. 비엔나신년음악회는 지금까지 70년이 넘는 연륜을 기록하면서, 단 한번 거른 적이 있다. 바로 1940년,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너무 거세어 중지되었다.


비록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신년음악회를 마무리하는 관습이 있었지만, 간혹 지켜지지 않는 해도 있었다. 1967년 빌리 보스코브스키(Willi Boskovsky)가 지휘했을 때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본 프로그램의 순서로 넣었기 때문에 앙코르 곡이 되지 못했고,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2005년 신년음악회 때에는 바로 며칠 전 동남아를 휩쓴 인도양의 쓰나미 희생자들을 추모하여 박수치며 즐거워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앙코르에서 제외했었다.


1936년부터 1979년까지 비엔나 필하모닉의 악장이었던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1955년부터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 시작하여 1979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25년 동안 지휘함으로서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기념비적인 존재가 되었다. 원래 1939년부터 시작된 신년음악회의 지휘는 대를 이어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가 지휘했다. 그 관습이 깨진 것은 빌리 보스코브스키가 건강상의 이유로 바통을 내려놓은 다음해부터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오스트리아인이 아닌 지휘자로서는 처음으로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로린 마젤은 1987년까지 7년간 신년음악회를 지휘하면서 비록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니었지만 비엔나의 전통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1987년부터는 비엔나 필 단원들이 투표하여 해마다 다른 지휘자를 초빙키로 했다. 베를린의 허버트 폰 카라얀을 지휘자로 초빙하고 싶어서 그런 방법을 선택했다는 얘기도 있다. 비엔나 필 단원들은 솔리스트도 투표로 초청하였다. 예를 들면 50주년 때에는 투표를 통하여 크리스타 루드비히(Christa Ludwig)를 솔리스트로 초청하였다.


*명지휘자의 무대 =비엔나신년음악회는 세계적인 명지휘자의 무대였다. 첫 연주회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떤 마에스트로들이 비엔나신년음악회를 화려하게 이끌어갔는지 살펴본다.

●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 1939, 1941-1945, 1948-1954

● 요셉 크립스(Josef Krips): 1946, 1947

● 빌리 보스코브스키(Willi Boskovsky): 1955-1979

● 로린 마젤(Lorin Maazel): 1980-1986, 1994, 1996, 1999, 2005

● 허버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87

●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88, 1991

●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1989, 1992

● 주빈 메타(Zubin Mehta): 1990, 1995, 1998, 2007

●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 1993, 1997, 2000, 2004

● 니콜라우스 하르논쿠르트(Nikolaus Harnoncout): 2001, 2003

● 오자와 세이지(Ozawa Seiji): 2002

● 마리스 얀손스(Mariss Jansons): 2006

● 조르즈 프레트르(Georges Pretre): 2008, 2010

●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2009

● 프란츠 벨저-뫼스트(Franz Welser-Möst): 2011


*요한 슈트라우스에 대한 전통 = 슈트라우스왕조 사람들의 왈츠 또는 폴카를 메인 레퍼토리로 삼고 있는 비엔나신년음악회의 전통은 실은 ‘왈츠의 황제’라고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2세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수 있다. 우선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특별한 관계를 살펴보자. 예전부터 비엔나 필하모닉의 단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우선 요한 슈트라우스 악단에 들어가 경력을 쌓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요한 슈트라우스 악단은 유럽 전역은 물론, 멀리 신대륙인 미국까지도 잘 알려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비엔나 필하모닉(당시는 필하모닉 콘서트협회라고 불렀음)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악단 출신의 단원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필하모닉은 진실로 비엔나적인 아름다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연주하지 않았다. 전통을 먹고 사는 비엔나 필하모닉 멤버들은 자기들이 춤곡이나 행진곡을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요한 슈트라우스는 당시 바그너와 브람스와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런 요한 슈트라우스를 비엔나 필하모닉은 무도회장에서 왈츠나 연주하는 세속적인 음악가로서 무시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비엔나 필하모닉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와 여러 번 함께 연주회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 개중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음악의 중요성과 특성을 깊이 인식하고 비엔나 필하모닉의 레퍼토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비엔나 필하모닉은 ‘사람들을 즐겁게만 해주는 가벼운 음악을 전통의 비엔나 필의 레퍼토리로 삼는 것은 자존심 문제’라는 인식을 고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필하모닉은 여러 번에 걸친 만남이 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필하모닉의 첫 번째 만남: 1873년 =요한 슈트라우스(이하 2세를 말함)와 비엔나 필하모닉(당시에는 궁정오페라오케스트라라고 불렀음)과의 첫 인연은 1873년이었다. 슈트라우스가 비엔나 오페라 무도회를 위해 작곡한 왈츠 ‘비엔나 기질’(Wiener Blut)의 초연이 1873년 4월 22일 무직페어라인(Musikverein: 악우회) 연주회장에서 비엔나 필하모닉의 연주로 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2세가 직접 지휘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통상대로 바이올린을 손에 잡고 연주하면서 지휘했다. 이 스타일을 포아가이거(Vorgeiger)라고 부른다. 바이올린을 들고 앞에 나와 지휘도 하며 연주도 한다는 뜻이다. 비엔나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대단히 진지하고 열성으로 연주하여 이날의 연주회를 대성공으로 이끌었다. 전통을 고집하는 비엔나 필하모닉과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와의 합작연주회는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다음번 인연은 같은 해 11월 4일, 비엔나 엑스포 개막식 때였다. 역시 요한 슈트라우스가 비엔나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엑스포 개막식에서는 요한 슈트라우스 자신의 왈츠는 물론 요셉 란너의 왈츠가 연주되었으며 그중에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그야말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 후 이른바 수아리(Soiree)라는 연주회를 궁정오페라하우스(현 슈타츠오퍼)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비엔나 시민들을 열광시켰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연주회는 ‘과거와 현재의 비엔나의 회상’이라는 타이틀로서 슈트라우스 가문의 작품만을 프로그램에 올린 것이었다. 수아리 연주회는 대성공이어서 1878년 제3회 연주회까지 개최할 정도였다. 물론 모두 요한 슈트라우스가 지휘하였다.


*왈츠의 황제와의 작별: 1899년 =1878년 제3회 수아리 연주회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필하모닉과의 합동 연주회는 없었다. 그러다가 1894년 비엔나 필하모닉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계 데뷔 5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를 주선하였다. 당시 요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에 없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 필하모닉에 전보를 보내어 깊은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 필하모닉이 자기의 지휘자 생활 50주년을 기념하여 연주회를 개최한데 대하여 ‘위대한 예술가들의 위대한 연주’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 다음번의 만남은 1899년 5월 22일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비엔나궁정오페라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비엔나 필하모닉을 지휘하여 ‘박쥐’의 서곡을 연주한 것이었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오케스트라의 연습과정에서 감기에 걸렸고 이것이 폐렴으로 발전하여 결국 열흘 후인 그해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를 추모하며: 1921년 =비엔나 필하모닉은 비록 요한 슈트라우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요한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선뜻 연주회 프로그램에 넣지 않았다. 일반 클래식 연주회에서 왈츠나 폴카를 연주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서였다. 비엔나 필하모닉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처음으로 본격 연주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인 1902년이었다. 비엔나 필하모닉은 정규 연주회의 프로그램으로 ‘봄의 소리’(Fruehlingsstimmen) 왈츠, ‘와인, 여인 그리고 노래’(Wein, Weib und Gesang), 오페레타 ‘기사 파즈만’(Ritter Pazman)에서 발레곡을 포함하였다. 하지만 그 후에 비엔나 필하모닉은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연주하지 않고 잠잠하였다. 그러다가 1921년 사정이 달라졌다. 그해에 슈타트파르크(Stadtpark)에 건립된 요한 슈트라우스의 기념상을 축하하여 비엔나 필의 연주회가 있었다.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가 지휘하는 비엔나 필하모닉은 <예술가의 생애’(Kuenstlerleben)>,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와인, 여인 그리고 노래>를 연주하였다. 지휘자 니키슈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을 너무도 완벽하게 해석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이후, 비엔나 필하모닉이 아니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를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는 세상에 없다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그 같은 찬사에 힘입은 비엔나 필하모닉은 1925년 10월 25일 요한 슈트라우스 탄생 1백주년 기념 연주회를 주최하였다. 펠릭스 폰 봐인가르트너(Felix von Weingartner)가 지휘한 이 연주회에서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본 프로그램의 레퍼토리로 장식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쩐 일인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는 앙코르 곡으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본 프로그램에는 포함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 반드시 앙코르 곡으로만 등장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전통의 시작: 1929년 =잘츠부르크에 머물고 있던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는 1929년 8월 11일 요한슈트라우스의 작품만을 가지고 연주회를 열었다. 크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가장 명쾌하고 정확하게 해석한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크라우스의 잘츠부르크 오케스트라는 마치 비엔나 필하모닉의 전통을 이어 받은 듯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완벽하게 연주하여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크라우스는 1933년까지 잘츠부르크에서 슈트라우스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크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작품뿐만 아니라 슈트라우스 가족 모두의 작품을 균형 있게 안배하여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 크라우스의 잘츠부르크 연주회는 1939년부터 시작된 비엔나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의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제1차 신년음악회: 1939년 =1930년대 중엽의 비엔나는 암울한 시기였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1938년, 히틀러는 ‘이제 오스트리아는 모국의 품에 돌아 왔다’면서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제3제국에 합병하였다. 그러면서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애국심과 조국애를 고취하는 어떠한 행동도 용인되지 않았다. 그 때에 잘츠부르크에 있던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비엔나에 올라와 비엔나 필하모닉과 함께 요한 슈트라우스 음악회를 준비하였다. 나라가 없어진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크라우스의 요한 슈트라우스 연주회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크라우스의 비엔나 필하모닉은 오스트리아의 독일 합병 이후 처음 맞는 신년을 축하하는 신년음악회를 개최하겠다고 요청했다. 나치는 ‘요한 슈트라우스 연주회’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대신 ‘특별 연주회’라고 부르도록 했다. 크라우스가 계획했던 신년음악회는 1월 1일이 아닌 12월 31일에 열렸다.


진정한 의미에서 비엔나 신년음악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41년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음악회의 타이틀은 신년음악회가 아닌 ‘요한 슈트라우스 콘서트’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콘서트’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 1943, 1944년에도 쉬지 않고 열려 비엔나 시민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1월 1일에도 크라우스의 ‘요한 슈트라우스 콘서트’는 개최되었다. 다만,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에는 열화와 같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1월 1일에 이어 1월 2일에도 앙코르 연주회를 가졌다.


사실상 ‘비엔나 신년음악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부터였다. 비엔나를 점령한 연합군은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나치에 협조했다는 명목으로 신년음악회의 지휘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요셉 크립스(Joseph Krips)가 1946-47년에 크라우스를 대신하여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연합군이 크라우스에 대하여 내린 2년 동안의 지휘 금지 기간이 끝나자 크라우스는 다시 신년음악회의 바통을 잡았다. 그후 크라우스는 7년 동안 신년음악회를 지휘했으며 1952년부터 새로 추가된 12월 31일의 송년음악회도 두 번이나 지휘했다. 크라우스는 1954년 세상을 떠났다. 크라우스는 토털 13회에 걸친 신년음악회를 주관하면서 이 행사를 진실로 비엔나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이룩한 슈트라우스왕조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해석규범은 오늘날 까지도 후배 지휘자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빌리 보스코브스키와의 25년: 1955년부터 = 1954년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비엔나 필하모닉은 후임자 문제로 난항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비엔나 필하모닉의 멤버들은 오랜 진통 끝에 악장인 빌리 보스코브스키(Willi Boskovsky)를 신년음악회 예술 감독으로 선출했다. 빌리 보스코브스키는 1955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25년간 신년음악회를 이끌었다. 빌리 보스코브스키의 슈트라우스 해석은 비엔나의 정취를 흠뻑 담은 것이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영광스러웠던 오스트리아제국(k.u.k)에 대한 한없는 향수를 불러 일으켜주는 것이었다. 특히 빌리 보스코브스키는 마치 요한 슈트라우스와 마찬가지로 한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연주를 하며 지휘를 했다. 포아가이거(Vorgeiger) 지휘였다. 역사상 빌리 보스코브스키만큼 매력적인 요한 슈트라우스 지휘자는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마침내 건강이 악화되어 지휘봉을 들 수 없게 되자 비엔나 필하모닉은 ‘이제 신년음악회는 빌리 보스코브스키와 함께 사라질 운명’이라고 하며 망연자실했다. 그러다가 비오스트리아의 지휘자에게도 지휘를 맡기기로 방향을 바꾸어 이탈리아로부터 로린 마젤을 초빙하였던 것이다. 로린 마젤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신년음악회를 지휘하여 타고난 재능을 한껏 선보였다.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회는 1987년 허버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것이다. 카라얀은 비엔나신년음악회의 포맷을 새롭게 바꾸도록 한 시초였다. 예를 들면 연주회 중간에 성악 솔리스트를 초청한 것이다. 카라얀 이후 매년 다른 지휘자가 비엔나신년음악회를 이끌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를로스 클라이버,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오자와 세이지, 니콜라우스 하르논쿠르트, 마리스 얀손스, 조르즈 프레트르가 비엔나 악우회의 무대에서 비엔나신년음악회를 빛냈다. 이들은 모두 비엔나 필하모닉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하늘이 별 따기, 입장권 구하기 = 매년 1월 1일 오전에 열리는 비엔나신년음악회의 입장권을 구하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비엔나 필하모닉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원하므로 방안을 강구했다. 12월 31일 밤에 송년음악회를 가지기로 했다. 똑 같은 지휘자가 똑 같은 프로그램으로 연주회를 갖기로 한 것이다. 이를 질버콘체르트(Silverkonzert)라고 부른다. 그래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 번의 연주회를 더 가지기로 했다. 관례적으로 12월 30일 오전에 갖는 총연습을 신년음악회와 똑 같은 연주회로 만들고 입장권을 팔기로 했다. 이를 포아아우프휘룽(Voraufführung)이라고 한다. 사전연주회라는 뜻이다. 이로써 사실상 비엔나신년음악회는 세 번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지휘자가, 같은 프로그램으로,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셈이다. 12월 30일의 포아아우프휘룽은 오전 11시에 시작한다. 12월 31일의 질버콘체르트는 저녁 7시 반에 열린다. 그리고 진짜 신년음악회(노이야르스콘체르트)는 1월 1일 11시 15분에 시작한다. 이렇듯 세 번에 걸쳐 음악회를 갖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입장권을 구하지 못하여 쩔쩔 매고 있다.


비엔나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의 입장권은 1년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한다. 1월 2일부터 1월 23일까지만 예약을 받는다. 그리고 추첨을 통하여 입장권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준다. 추첨은 3월 초에 한다. 추첨에 당첨되지 않으면 아무리 돈이 있어도 입장권을 살수 없다. 1월 1일의 신년음악회는 한 사람이 두 장 이상의 입장권을 살 수 없다. 누구든지 1월 1일의 신년음악회를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경쟁이 여간 치열한 것이 아니다. 12월 30일이나 31일의 연주회는 그나마 여유가 있다. 1월 1일 신년음악회의 입장권은 최저가 30유로이며 가장 좋은 좌석은 940유로이다. 우리 돈으로 1백40여만 원이다. 송년음악회인 12월 31일 밤의 질버콘체르트의 입장권은 가장 좋은 좌석이 720유로이다. 우리 돈으로 1백만 원이 조금 넘는다. 12월 30일의 총연습 연주회의 입장권은 가장 좋은 좌석이 380유로이다.

 

신년 음악회 프로그램

Das Programm des Neujahrskonzerts 2011 unter Franz Welser-Möst

Johann Strau�

 

 

 

 

Reiter-Marsch, op. 428

 

Johann Strau�

 

Donauweibchen. Walzer, op. 427

Johann Strau�

Amazonen-Polka, op. 9

Johann Strau�

Debut-Quadrille, op. 2

 

Josef Lanner

 

Die Schönbrunner. Walzer, op. 200

 

Johann Strau�

 

Muthig voran! Polka schnell, op. 432

- Pause

 

Johann Strau�

Csárdás aus "Ritter Pasman"

Johann Strau�

Abschieds-Rufe. Walzer, op. 179

Johann Strau� Vater

Furioso-Galopp nach Liszts Motiven, op. 114

 

Franz Liszt

 

Mephisto-Walzer I

 

Josef Strau�

 

Aus der Ferne. Polka mazur, op. 270

 Johann Strauß�

 Spanischer Marsch, op. 433

 

Joseph Hellmesberger

 

Zigeunertanz aus "Die Perle von Iberien"

 

Johann Strau� Vater

 

Cachucha-Galopp, op. 97

Josef Strau�

 

Mein Lebenslauf ist Lieb und Lust. Walzer, op. 263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건, 그 큰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신년 음악회’ 말고 다른 의미 있는 공연은 없는 것일까? 음악의 도시인만큼, 이름에 걸 맞는 수준 높은 다른 정기공연은 무엇일까?


*폭발적 관심은 쉔부른클래식의 효음악회 = 바로 세계 최고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세계 연주자들의 꿈의 무대인 '빈 뮤직 페어라인 골든홀'에서 열리는 정기 연주회 ‘쉔부른 콘서트’(schwingungen concert 효도 연주회)

여기 놀라운 사실은, 이 공연을 바로 한국의 ‘쉔부른 클래식 메니지먼트’가 지휘, 감독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3년 설립된 쉔부른 뮤직컨설팅(이하 SMC)은 유럽 문화의 수도이자 음악의 본고장인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본사를, 한국에 지사를 두고 있어 유럽을 포함한 세계  각 지역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핀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러시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폴란드, 미국, 캐나다, 멕시코, 이집트, 중국, 타이완)에서 연 150회 이상의 국제무대를 조직했다. 또 매년 여름에 실시되는 성공적인 오스트리아 언어 연수 및 유럽문화 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인의 위상을 높이며, 세계 각국 음악인의 교류와 청소년 엘리트 음악교육을 지향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작은 기업이 내로라하는 전 세계 클래식 기업들도 하기 힘든, 아니, 시도도 어려운 비엔나 페어라인 골든홀의 정기연주회(schwingungen concert)를 기획하고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쉔부른 콘서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7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천불이 겨우 넘어서고 있을 때, 많은 한국의 가난한 유학생들은 학비가 모두 국가제정으로 운영되는 오스트리아 및 독일로 이주하여 유학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인간평등의 기본원칙 아래 후진국 및 개발도상국에서 오는 외국인 유학생에게도 국내인과 똑같은 혜택을 부여하였고, 그 혜택으로 쉔부른의 회장 권숙녀도 비엔나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리하여 쉔부른은 이러한 세계 최고의 사회보장제도를 가능하게 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한국의 효 사상, 그리고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비엔나 뮤직 페어라인 골든 홀’을 연결하여 그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에게 보답하는 연주회를 여는 것이 schwingungen concert의 기본 취지이다.

오스트리아의 여당과 야당에서 운영하는 실버협회(oesterreichische pensionistenverband-회원 140만명 & seniorenbund - 회원 30만명)와 연합하여 2006년 6월 21일 첫 번째 ‘쉔부른 콘서트’를 시작으로 매년 2회씩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9년에는 3회의 연주회를 기획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더 많은 협조자들이 조인하여 앞으로 먼 미래까지 ‘쉔부른 콘서트’가 연결되어 한국의 음악인들이 유럽으로 진출하는 데에 교두보 역할이 되기를 바란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이루어지는 Franz Welser-Möst의 수준 높은 음악이 있는 ‘비엔나 신년 음악회’. 비엔나에 직접 가지 못하는 클래식 마니아들의 아쉬움은 많이 크겠지만, 2011년 1월 중(일정미정)에 하는 KBS의 실황 연주로 조금은 만족되리라 믿는다.


음악인들의 나라 오스트리아, 그 속의 클래식이 살아 숨 쉬는 도시 비엔나.

1939년 이후로 우리와 늘 함께 한 ‘비엔나 신년 음악회’의 전통이 앞으로도 전 세계 클래식계가 문화적 향유를 느낄 수 있게끔 쭉 이어 나아가기를 바란다.

출처 : 정록의 뜰
글쓴이 : 정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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