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안삼 (작곡가, 칼럼리스트) - 2009년 7월 31일(금)
지금의 나를 낳게 하신 은사 김동진 교수님의 비보를 조금 전
중앙일보 김호정기자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다
김동진 스승과 나의 인생에 대한 인연 그리고 잊지 못할 기억을 담으며 아픔 마음 담는다
1961년 서라벌 예대 기악과에 입학했던 당시 스승은 화성학 지도를 담당 하셨다
문제를 풀어가며 지도 받던 1학년 1학기 말 쯤 랫슨이 끝난 후 작곡과로 전과 하라우!
그 한 마디에 2학기 작곡과로 전과 이 후 경희대로 떠나 나는 다시 스승을
따라 경희대로 편입 했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 있듯 나는 늘 선생님을 존경 하며 따랐으나
스승은 가르킴 이외 거의 말씀이 없었다 엄격한 지도만 있었다
잔 정도 웃음도 칭찬도 없었다 언제나 고개만 끄덕였다
묵묵히 지도만 이어졌다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외관상 보고 읽는 것은 스승의 의복과 신발 뿐이었다
그 이유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살아가고 계셨고 변화하는 모습이 아무것도 없었다
계절 마다 바뀌는 것은 온도를 맞춰 입는 낡은 신사복 정장 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모습은 판이했다
낭만 배인 환상적 예술가 다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당시 김동진 교수.이흥렬교수.김대현 교수.이승학교수 네분이 주요 과목을 담당하고 계셨다
1961년 여름 우기때 신은 짧은 고무 장화는 그 해 가을까지 신고 다니셨다
비가 그쳐 햇빛이 쨍쨍 한 여름 부터 가을까지 무던히도 참고 있는듯 보였다
아! 작곡가가 가난 하다드니 저렇게 어렵게 사시는구나 !
내가 이 다음 작곡가가 되면 스승같이 고무 장화에 두어 벌 양복으로 견뎌야 할까 ?
이 후
어느날 스승집에 다녀가라는 기별있어 찾았다
같은 과 신석호라는 친구와 물어 찾았다
대문에 들어서니 붉은 벽돌 집 2층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의외였다
당시 내가 느끼고 상상 했던 허름한 양복 고무 장화 연상 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큰 저택의 풍요로운 모습이 다가 왔다.
다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을 알았다
이층 거실은 탁 튀어 있었으며 100 여명이 연습할 수 있는 공간과 피아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1층 넓은 거실은 검 붉은 비로도 커텐이 드려져 있었다
당시 베토벤 합창 교향곡 리허설을 직접 지도하고 계셨으며 나는 합창단원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참가 했었다 당시 내 실력이 모자람을 발견하고 그 다음 날
나는 출연을 포기 했으므로 공연 참가 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한 친구 역시 그만 두었다
이 후 나는 시골에서 교사로 근무 하던 중 1980년 뉴욕으로 떠났다
돌아 온 후 복직을 하면서 조금 빠른 속도로 작품을 써 나갔으며
2000년 제 3회 작곡 발표회를 서울 영상아트 홀에서 스승을 모시고 공연을 갖게 되었다
수십년 세울이 흘렀으나 연락이 닿자 금새 기억 해 냈다
스승과 수 십년 만의 만남이었으며 이 후 내가 활동하는 곳 내가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는 모든 단체엔 어김없이 스승은 나의 활동에 자리 하셨다
나는 가곡을 활성화 시키기 위해 단체를 설립 해 나갔다
제일 먼저 만든 단체가 한국예술가곡 연합회를 창립 해 이끌어 갔으며 임기가
지나면 물려주곤 또 단체를 만든 후 또 넘겨 주기를 3번 계속 이었다
어느것 하나 나무라지 않았으며 내가 하는 활동을 말없이 지켜 보며 어김없이
함께 자리 하셨다
100인 창작음악회를
만들었고 포럼.우리시우리음악단체를 창립 한 후
4인 작곡가 (최영섭 이수인 임긍수 이안삼) 활동을 개시했다
주변에선 말리기도 했으며 원망도 했으나 스승님은 아무 말씀 없이 언제나
함께 자리 하며 지켜 주셨다
당시 스승은 이미 90세를 훨씬 넘겨 기력이 쇠약 해 지므로 가끔 자문을 구하기만 했다
스승은 내게 그래 잘 했어 열심히 하라고 당부 하셨다
스승의 말씀 중 몇 가지 기억을 요약 해 보면 참 스승의 아름다운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내 기억에 남는 10 여년 간 스승의 말씀과 그 간의 인생 작품에 대한 발 자취를
내리고저 한다
90세 되든 해 서초구민 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내가 스승께 문의 했다 선생님 이번 MBC 가곡제 선생님 작품 공연 소식과 선곡된
작품을 알려 드렸드니 조금 짜증 내셨다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아니 이 봐 !
MBC 가곡제는 왜 해마다 내 작품을 넣는지 모르겠어 ?
* 아니 젊은 작곡가 많는데 새로운 작품을 알리려 들지 않고 왜 내 작품을 자꾸만
연주하는지 모르겠어 !
* 작곡단체 기획 사업으로 해마다 신작 작품 선곡 및 출연료 에산 산출을 보구선
이게 왜 이렇게 많은 출연료를 성악가에 지불 하느냐?
가난한 시인 작곡가 들이 돈을 내어 공연 하는 마당에 무슨
출연료를 준다는게야 ! 예술가 들이 무슨 돈이 있어 ! 작곡가 작품은 연주자는
그냥 돕는게 맞지 않은가 ?
* 한국예술가곡 연합회 회의 마친 겨울 밤 9시 넘은 캄캄한 밤 귀가 길 스승께 택시로
모실려고 차를 새웠다
스승 말씀 ! 이것 봐 나는 혼자 갈 수 있어 타지 않겠어 전철을 이용하겠다
몇 분간 설득 하다 결국 뿌리치고 혼자 전철 타고 귀가.
* 포럼.우리시우리음악 회의 후 나를 불러 선물 하나 하겠네 받아 본즉 스승께서
60세쯤 녹음하신 음반 한 장을 받았다 직접 노래 하셨다며 건낸 음악 감상 후
놀라운 가창력 새로운 작품 발견.
* 의복은 30 여년 전 입으셨던 오바코트, 퇴색되고 낡은 의복
오리털 잠바 즐겨 입고 계셨음
* 소식가로 음식 남으면 강아지 먹인다며 비닐 봉지에 넣어 귀가.
* 선생님 가고파 원본 갖이고 계십니까? 대답 않음
* 회의 시작 부터 끝 날때까지 스승께선 발언 한 적 10 여 년간 없음
* 한 생 술.담배 하지 않음
* 바이올린 연주력 뛰어 나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으나 제자 앞 연주 한적 없음
* 학교 (경희대) 렛슨 하다 조율이 정밀 하지 않으면 직접 조율 해 나감.
* 창 달린 운동모 즐겨 씀 수년간 사용하다 보니 창이 우거러 짐
* 회의 참석시 사모님께서 돈 많이 소지 하면 위험 하다며
언제나 1만원만 주심
* 94세 되든 해 모처럼 축사 부탁 드렸더니 20 여 분간 꼿꼿 한 자세로 한국 가곡
발전과 방향제시 하므로 놀라운 기억력 감탄!
작품성향
* 서정적이며 낭만 . 희망의 메세지 담고 있으며 고향,그리움 배인 선율 짙게 내려져 있음
* 민족적이며 고전적 내용 담긴 소재로 접근 확대 하며 근대 음악 기법으로 승화 시키는데
성공 하였으나 현대 음악.조성없는 무조 기피 .전통 화성학 기초 둔 민족주의 음악 지향
* 가곡: 자유시를 즐겨 쓰며 형식 구애 받지 않고 작품 중 조성 변화 즐겨 사용.
* 이은상 시인의 작품 즐겨 사용 홍난파 이후 근대 가곡 사 거목으로 96세 마감 하시다 .
대표작
* 가곡 : 가고파.목련화.수선화. 비롯 수 백 곡 작품 남김
* 국민가곡: 조국찬가, 봉이오면
* 군가 : 육군가 비롯 많은 작품 남김
* 김동진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 : 2007년 10월 이후재 시인( 전: KBS 아나운서)작품 추정
* 경희대 음대 학장.예술원 회원.포럼우리시우리음악 고문
* 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작곡가 선정 / 음악가가 뽑은 한국 최고의 작곡가로 추대
* 향년 96세 일기로 2009년7월31일 서거
좌로 부터 시조시인 이근배.황금찬시인.황철익작곡가.정치근시인.박찬석작곡가 .
김동진작곡가.최영섭작곡가. 단상 (이해인수녀님.시인)
제 1 회 울림 예술 대상 수상자 좌에서 4번째 Ten 박세원(성악부문.서울대교수)
허방자(합창작곡부문,숙대교수) 이안삼(가곡작곡부문)박신화(합창지휘부문 ,이대교수)
이혜자(합창지도부문)
** 흐르는 곡 :
가고파 (전편) / 이은상 작시, 김동진 작곡 / 바리톤 최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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