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 últimas composiciones de Violeta Parra | |
Violeta Parra 1966
Violeta del Carmen Parra Sandoval 칠레
No.1 - Gracias a la Vi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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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 últimas composiciones de Violeta Parra Violeta Parra (1917 –1967) 1966 [Chile: RCA Víctor CML-2456] Instrumental accompaniment by Isabel and Angel Parra, Alberto Zapican. // Acompañamientos instrumentales de Isabel y Angel Parra, junto a Alberto Zapican. | |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 dos luceros que cuando los abro perfecto distingo lo negro del blanco y en alto cielo su fondo estellado y en las multitudes al hombre que yo am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cielo que en todo su ancho graba noche y dia grillos y canarios martillos, turbinas, ladridos, chubascos y la voz tan tierne de mi bien ama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el sonido y el abecedario con l las palabras que pienso y declaro madre amigo hermano y luz alumbrando la vita del alma del que estoy amand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marcha de mis pis cansados con ellos auduve ciudades y charcos, playa y desertos, montanas y llanos y la casatuya, tu calle y tu pati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di el corazon que agita su mano quando miro el fruto del cerebro umano quando miro el bueno tan lejos del malo quando miro el fondo de tus ojos claros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me ha dado la risa y me ha dado el llanto asi yo distingo dicha de quebranto los dos materiales que forman mi canto y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rio canto y el canto de todos que es mi proprio canto Gracias a la vida que me ha dado tanto |
Gracias a la Vida
Violeta Parra (1917 –1967)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흰 것과 검은 것, 높은 하늘의 많은 별, 그리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 사랑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구별 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귀뚜라미와 까나리오 소리, 망치소리, 터빈소리, 개짖는 소리, 소나기 소리, 그리고 내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소리, 이런 소리들을 밤낮으로 어느 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청각,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 사랑하는 영혼의 길을 비춰주는 빛 이런것들을 생각하고 말하는 단어의 소리와 문자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도시와 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평원, 그리고 너의 집과 너의 길, 너의 정원을 걸었던 그 피곤한 나의 다리로 행진을 하게 한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합니다.
인간의 지식의 결실을 볼 때, 惡에서 아주 먼 善을 볼 때, 너의 맑은 두 눈의 깊이를 볼 때, 그것을 알고 떨리는 심장 그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에 감사드립니다.
행운과 불행을 내가 구별하게 한 웃음과 울음을 내게 준 삶에 감사 드립니다. 웃음과 울음으로 내 노래는 만들어졌고 모든이의 노래는 같은 노래이고 모든이의 노래는 내 자신의 노래입니다. |
칠레 민중이 사랑한 비올레따 빠라 Violeta Parra (1917 –1967)
비올레따 빠라는 칠레의 저명한 지식인 집안 출신의 시인이자 싱어송라이터. 그녀는 멕시코의 옥따비오 빠스, 니카라과의 에르내스토 카르데날과 함께 70~80년대를 대표하는 중남미 시인으로 한때 산티아고대 박물관장까지 지낸 민속학자로서 민속 음악을 채집하다 본인이 직접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대모가 된 민중가수이자 칠레의 열렬한 반독재 운동가이기도 하다. 실연의 아픔으로 비극적인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작사 작곡해 직접 반주하며 부른 이 노래는 독재 치하에 신음하는 민중에게 가시밭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로 칠레 민중의 삶의 노래, 혁명의 노래가 되었으며 집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불려졌다. 존 바에즈, 밥 딜런 등 많은 아티스트들이 불렀는데 그녀의 음성으로 부른 것과 아르헨티나의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기수인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것이 있다.
"이 노래는 바로 여러분들의 노래이자 우리 모두의 노래이고, 또한 나의 노래입니다. 삶에 감사합니다. 삶에 감사합니다."
이 말은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 1917~1967)가 자살하기 직전에 한 마지막 공연의 인사말이다. 그녀는 1967년 2월 5일 실연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세운 민속박물관 천막 안에서 권총으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1917년 칠레 남부의 산 까를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 미술, 문학 분야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 그리고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의 대모'로 우리에게 익숙한 민중가수다.
비올레따 빠라의 음악운동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1950년대. 오빠인 니까노르(Nicanor Parra)와 함께 반시(反詩)운동을 하던 시인 네루다(Pablo Neruda)의 조언으로 1952년부터 칠레 전국을 돌며 민요수집에 나서면서부터다. 수년간에 걸친 이 여행은 역사적인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이때 수집한 민요, 시, 전설, 춤 등의 자료는 전통민요에 포크음악을 결합한 '폴크로레'(Folklore)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그녀는 인근의 페루나 볼리비아, 아르헨티나의 토속적 리듬과는 다른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굳히게 됐다.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은 라틴 아메리카의 노래 문화운동을 민중 속으로 뿌리내리는 데 원동력이 됐다. 이 운동은 이사벨 빠라(Isabel Parra) 일가와 빅토르 하라가 그 줄기를 이었으며, 그후 낄라빠윤(Quilapayun), 인띠 이이마니(Inti Illimani), 야뿌(Illapu) 등에 의해 계승됐다. 특히 역사적인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당 정권 창출의 밑거름이 됐고,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전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혁명을 일으키는 도화선의 역할을 했다.
민중의 삶과 애환을 담은 비올레따 빠라의 노래들은 그녀 스스로에게도 정신적 자양분이었다. 그녀는 농민의 삶, 칠레의 자연을 다룬 민속음악을 노래하였으며, 점차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는 노래(La Carta)나 중남미의 연대를 강조하는 노래(Los pueblos americanos)들을 불렀다.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좌파 정당인 인민연합당 문화선전 핵심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61년 까사 드 빨라스(Casa de Palas)라는 문화모임을 조직한데 이어 1964년에는 가족들과 함께 '라 빼냐 데 로스 빠라'(la pena de los para)라는 카페와 함께 민속박물관을 만들고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전파와 확산에 주력한다. 이때의 그녀의 조력자는 바로 유명한 누에바 깐시온의 순교자로 불리는 빅토르 하라(Victor Jarra, 1938~1973)다.
비올레따 빠라의 대표곡으로는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와 함께 군사독재에 신음하는 암울한 칠레 민중의 현실을 노래한 'Que vamos a hacer'(우리가 가는 길), 'Santigo, penando estas'(산티아고, 너는 견디고 있구나), 쿠바의 인민가수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칠레의 민중운동가 루이스 에밀리오 레까바렌에게 바치는 노래 'Rodriguez y Recabarren'(로드리게스와 레까바렌) 등이 있다.
지금 흐르는 곡은 비올레따 빠라가 부르는 'Gracias a la Vida'이다. 그녀의 유언이 되기도 했던 마지막 노래이다. 비올레따 빠라가 직접 작사 작곡했으며. 그녀가 반주하며 부른 노래였다. 독재 치하에서 이 노래는 가시밭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로 칠레 민중의 삶의 노래, 혁명의 노래가 되었으며, 집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불려졌다.
'Gracias a la Vida'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아르헨티나의 민중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다. 1979년 군부독재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1982년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해서, 홀을 가득 메운 극장 안에서 숨죽인 민중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칠레의 민중들을 위해서 민중들에게 노래한다. 만약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결코 승리만을 위하여 기타를 잡았노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릇된 것인지 그 차이에 대해서 노래할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결코 나는 노래하지 않겠다."
- 비올레따 빠라의 '자서전' 중에서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은?
"노래없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새로운 노래'의 뜻을 갖는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의 모토이다. 군부독재가 지속되고 절대빈곤이 해결되지 않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예술행위는 곧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이 됐다. 누에바 깐시온은 이런 상황에서 태동한 현실 참여 문화운동이다.
그 음악적 뿌리는 정복자들(Conquistadores)에게 수탈과 착취, 학살의 대상이 됐던 인디오의 문화이다. 누에바 깐시온은 민족적 정체성을 선주민 인디오 문화에서 찾았고, 칠레의 전통음악인 꾸에까(Cueca)를 기본으로 안데스의 폴크로레(Folklore)에서부터 라틴 아메리카 전반의 민중음악을 수용했다.
이 운동의 선구적 업적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가인 아따후알빠 유빤끼(Atahualpa Yupanqui)에서 시작된다. 그는 안데스 일대의 민간전승민요를 수집하고 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 기법과 음계를 살리면서 새로운 곡도 만들었다. 유빤끼를 가리켜 '누에바 깐시온의 아버지'라 부른다.
칠레에선 보다 정치적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했다. 미국의 상업적 대중음악에 대항하고 나섰고, 민족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라틴 아메리카 전체 민중과 연대를 모색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비올레따 빠라와 빅토르 하라의 노래는 죽는 날까지 언제나 가난한 민중들, 핍박받는 사람들을 향해 자유와 해방을 염원하는 노래운동의 상징이 됐다.
누에바 깐시온은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국경없이 상호연대하여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표상되고 후대들에게 계승됐다. 그리고 아메리카의 연대를 뛰어 넘어 세계인권운동으로까지 확대됐다. 라틴 아메리카의 처지가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
Gracias A La Vida (Here's To Life)
Joan Baez
Track No.1 - Gracias a la Vi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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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k Music의 여류 선봉장 "Joan Baez"
1960년대 전 세계를 강타했던 아메리칸 포크 뮤직의 위력은 팝 음악 역사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포크 음악의 전성기가 있기 까지에는 1940-1950년대의 구전 민요들을 열심히 수집하여 보급함으로써 American Modern Folk의 길을 닦은 거물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미국 포크 음악의 전설로 남겨진 우디 거스리, 피트 시거, 허디 레드베터, 오데타, 존 로맥스 등이다. 이들의 노력은 결국 1960년대에 등장한 존 바에즈, 밥 딜런 등에 의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60년대 포크 뮤지션들이 노래 속에서 주장했던 것은 "인간애", "비순응", "반항", 열망", "그리움"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음악들은 대부분 앵글로 아메리칸들의 고전 민요들과 니그로 아메리칸들의 종교적인 민요들이 혼합된 것을 기초로 한다.
이런 음악이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뉴욕같은 대도시 뒷골목, 그리고 그리니치빌리지의 포크 전문 클럽이 성행하면서 음을 이루었으며 그 대표적인 선봉이 바로 여가수 "Joan Baez"였다.
존 바에즈는 미국에서 멕시코와 아일랜드 혈통의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그녀는 뉴욕, 보스턴 등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학교를 졸업했는데 이미10대 초반부터 기타를 훌륭히 연주하였다. 그리고 1958년 처음으로 보스턴의 한 커피 하우스에서 대중들 앞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시카고의 'Gate of Horn'이라는 유명한 포크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1959년 7월 두번째 열린 'Newport Folk Festival'에 초대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어서 CBS-TV의 'Folk Sound U.S.A'에도 출연,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밥 딜런 같은 포크 가수들과 어울려 60년대 포크뮤직의 전성기를 가져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여가수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존 바에즈는 4960년대 포크 명곡을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Joan Baez"의 티 없이 맑고 풍부한 소프라노 목소리는 음악에 윤기가 절로 흐르고 있다. 우리 삶의 다양한 감정과 사연을 담은 노래들이 소박한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순수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며, 그녀의 노래가 지닌 관객을 휘어잡는 뜨거운 현장감을 함께 느낄 수 있다. | |
Photo: James Baldwin, Joan Baez, and James Forman (left to right) enter Montgomery, Alabama on the Selma to Montgomery march for voting rights, 1965. |
Gracias a la Vida - Mercedes Sosa | |
아르헨티나 민중이 사랑한 메르세데스 소사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고난받는 이들의 어머니'라 불러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인디오의 피가 왜 뜨거운지 그녀를 보면 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인생은 한마디로 거룩하다.
혹독한 군부통치와 독재를 경험했던 전 세계 민중들에게 양심과 정의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었던 그녀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뚜꾸만의 산 미구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조국 아르헨티나는 우리에게 불행한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1982년 12월 민주정권이 들어서기까지 근 170년간 잦은 군사쿠데타로 시달려 온 나라다. 국민의 10%가 인디오이고 나머지는 유럽계 백인이다. 인디오들은 16세기의 스페인 침략을 겪으면서 이후 백인 농장주인들의 착취와 그 사람들을 지원하는 군사독재정권의 폭정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리고 1974년 페론이 사망한 뒤 1976년 초 쿠테타를 거쳐 정권이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군부로 넘어가면서 여느 남미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포정치가 시작됐다. 정치·사회적으로 탄압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민중의 삶과 꿈은 절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1977년부터 군사독재가 종식되기까지 약 3년간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이라 불리는 군부의 인권탄압으로 3만여명의 민중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암울한 정치상황은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반독재와 저항의 노래들이 그 아픈 역사를 이어갔다.
이때 소사는 '인간애'가 넘치는 노래를 통해 아르헨티나 민중들은 물론, 똑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에게 희망을 노래했다. 군부에 맞서 저항의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노래는 라디오나 TV에서 방송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중들의 사랑은 군부독재가 휘두른 칼날 위에서도 뜨겁기만 했다. 소사에게는 늘 비밀경찰이 따라붙었고, 자신이 언제 어떻게 실종될지 모르는 위험속에서도 그녀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민중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고 독재와 폭력에 저항하는 노래,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래, 반전평화 등의 노래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존 바에즈, 밥 딜런 등 세계적인 가수들과 함께 반전평화 콘서트를 열었고, 국제사면위원회 콘서트에 참여하여 자유와 정의를 노래했다. 아르헨티나 민중의 지지는 폭발적이었다.
그녀는 믿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세상사의 표면도, 그 내면도,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 내가 변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 '모든 것은 변하네'(Todo Cambia)
소사의 노래에는 '언어'가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노래는 '언어'가 아니라 '목소리'다. 목소리에 뛰어난 표현력이 숨어 있다. 세계인이 감동하는 이유다. 그녀는 목소리를 통해 노랫말이 담고 있는 정서를 완벽하게 전달할 줄 아는 소리꾼이었다.
그녀의 노래를 들어 보라. 신들린 듯 빨려드는 소사의 노래는 때로는 영혼을 충만하게 만들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를 주며, 때로는 우렁찬 외침으로 청중들에게 신념을 전달한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다가도 불의에 대한 거센 분노를 담는가 하면, 처연히 솟아나는 이웃들의 슬픔에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기도 한다.
칠흑 같이 검은 머리카락, 전형적인 인디오의 모습을 한 얼굴, 그리고 전통의상인 판초를 입은 소박한 모습으로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설 때마다 소사에게 쏟아졌던 청중들의 기립박수는 그녀의 삶과 노래를 일치시킨 여인에게 바치는 무한한 존경과 애정의 표시였다.
군사정권 아래서 체포와 석방을 되풀이하던 소사는 1979년 1월, 아르헨티나에서 영구 추방됐다. 그녀의 망명 생활은 소사의 아티스트적 면모를 새롭게 여는 지평이 됐음은 물론이다. 안데스의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포크로리카'(Folklorica)에 음악적 뿌리를 두면서 록과 재즈의 요소까지 넓히는 기회가 됐다.
1982년, 마침내 소사는 망명생활을 끝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한 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정권은 몰락했다. 귀국 후 한 오페라 극장에서 가진 그의 공연은 그야말로 감동의 무대였다. 'Gracias a la Vida', 비올레따 빠라의 원곡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노래, 홀을 가득 메운 극장 안에서 숨죽인 민중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부른 노래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전세계 민중을 위해 노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나를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니까요. 노래는 변합니다. 투쟁과 단결의 노래도 있고 인간의 고통에 대해 호소하는 것도 있습니다. 내가 198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대 위에서 국민들에게 새롭게 표현해야 할 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건 국민들에게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어요. 왜냐구요? 아르헨티나에 산다는 게 투쟁이거든요. 아니, 라틴 아메리카에 산다는 게 그렇지요. 나는 국민들에게 무슨 문제제기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소사를 가리켜 '누에바 깐시온의 거인'으로 부른다. 1970년대부터 소사는 비올레따 빠라의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 아따우알빠 유빵끼의 'Guitara di melo tu'(기타여 네가 말해다오), 빅토르 에레디아의 'Razon de vivir'(살아가는 이유) 등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곡들을 완벽하게 소화했으며, 이를 빛내는데 그의 음악적 열정을 바쳤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모든 노래들은 영혼을 울릴 것 같은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처연히 살아나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심장을 녹이는 뜨거움이 있다. 감정을 모두 담고 있는 풍부한 표현력, 삶의 연륜과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살가운 목소리, 노래 마디마다 묻어나오는 인디오의 애환, 강렬하고 우직한 힘, 그녀의 음악이다.
소사는 50년 이상을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노래했다. 인디오의 민속음악을 세계에 알린 월드뮤직의 거장, 누에바 깐시온 최고의 해석자, 고난받는 이들을 노래로 달래준 어머니의 존재, 그녀에 대한 화려한 수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랑과 뜨거운 신념이 그녀의 음악과 활동을 낳은 것이라고.
그녀의 나이 일흔 둘. 아르헨티나의 고통스런 현대사를 민중과 부대끼며 영혼의 목소리로 세상의 분노와 슬픔을 달래주던 '크고 강한' 가수. 그녀의 음악인생이 민중의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고해와 성찰을 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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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소사의 대표곡으로는 Kyrie(불쌍히 여기소서), 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합니다), Todo Cambia(모든 것은 변하네), Yo Vengo A Ofrecer Mi Corazon(내 마음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Misa Criolla(미사 크리올라 : 인디오 미사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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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monds & Rust in the Bullring (Live 1988) | |
Diamonds & Rust in the Bullring 1988
Joan Baez & Mercedes Sosa
No.11 - Gracias a la Vid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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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el Disky (Netherlands) Recorded Bilbao, Spain, December 1988 Orig Year 1988 Personnel Joan Baez - vocals, guitar Mercedes Sosa - vocals John Acosta - cello L.A. Mass Choir - background vocals Additional Info Netherlands
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존 바에즈 | |
잘생긴 꾀꼬리 꽃미남 리차드강 어리버리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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