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유럽은 ‘불멸의 천재’를 감당 못했다
`피가로의 결혼` 만든 `돔 골목길 5번지 시대`가 절정기... 베토벤·하이든도 방문
▲ 18세기 슈테판성당과 시민들의 모습. 모차르트의 시신은 1791년 12월 6일 화살표(←)의 시신보관소에 여러시간 방치되어 있었다. |
그후 214년이 흘렀다. 모차르트가 묻힌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는 더 이상 교외가 아니다. 당시 모차르트 부인 콘스탄체와 몇 명의 친구들은 마차를 타고 1시간 걸려 이 공동묘지 입구에 도착했지만 지금은 버스로 1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지난 11월 22일 오전,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기자는 공동묘지에 들어섰다. 공동묘지는 1784년부터 1874년까지 90년간 사용되었다. 공동묘지 정문에는 ‘모차르트 2006’과 관련된 장소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완만한 경사의 길을 100여m쯤 오르니 왼편에 ‘모차르트 묘지’가 보인다. ‘W. A. Mozart 1756~1791’. 이게 전부다. 흔한 묘비명도 없고 그 옆에 어린 천사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요절한 천재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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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 같은 존재 모차르트는 빈에서 35년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다. 1781년 봄부터 1791년 겨울까지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13곳에서 살았다. 모차르트는 빈의 20여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모차르트의 흔적은 대부분 빈의 한복판 슈테판성당을 중심으로 도보로 10~25분 거리에 펼쳐져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손바닥만한 공간에서 천재음악가는 절정의 10년을 보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754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최초로 제국의 심장부인 빈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빈의 인구는 17만5000명. 빈 인구는 1800년에 23만2000명이 되었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 빈은 인구 20만의 도시였다. 2005년 빈의 인구는 200만명. 도시가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모차르트가 살았던 흔적들은 몇 곳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둔 곳은 라우헨슈타인가(街) 8번지. 병약한 몸으로 의뢰받은 ‘레퀴엠’을 작곡하다 미처 끝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그 집. 라우헨슈타인가 8번지는 빈 최고의 번화가 카른트너가와 인접해 있다. 모차르트 팬들은 가슴 아파한다. 말년의 모차르트가 얼마나 돈에 쪼들려 힘들어했는지를. 천재음악가의 비참한 마지막 나날을 지켜본 그 집이 있던 자리에는 빈에서 가장 화려한 스테플 백화점이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백화점 후문에는 ‘1791년 12월 5일 모차르트가 사망한 곳’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망진단서에 기록된 그의 사인은 급성 속립성 발진. 입관은 프리메이슨단의 의식에 따라 두건이 달린 검은 외투가 입혀졌다.
그의 장례식은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슈테판성당에서 치러졌다. 9년 전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당에서 생의 마지막 의식이 초라하게 치러졌다. 성당으로 들어가서 왼편에 있는 십자가소성당. 모차르트의 시신은 이곳에서 약식 장례식이 끝난 뒤 성당 뒤편 시신보관소로 옮겨졌다.
그는 여기서 여러 시간을 이름 없는 이들과 함께 누워있었다. 모차르트가 누워있는 곳에서 돔(Dome) 골목길 5번지까지는 100여 걸음, 엎어지면 코 닿을 데다. 모차르트는 누워있으면서도 돔 골목길 5번지에서 보낸 아름다운 나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골목길도, 집도 옛날 그대로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84~1787년까지 3년여 살았다. 모차르트가 이 집 2층에 살면서 유명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고 해서 ‘피가로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모차르트 전문가이드 라이너 레훼브는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의 대성공으로 이곳에서 경제적으로나 명성으로나 가장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한다. 1995년 타임지가 지난 1000년의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선정한 곡이 바로 ‘피가로의 결혼’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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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의 결혼’을 쓴 1785년에 그는 피아노 5중주곡을 썼다. 평론가들은 1785년을 창작과 성찰에 있어 위대한 해라고 평가한다. 2층은 큰방 네 개와 작은방이 두 개나 되었다. 모차르트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상상력에 불이 붙을 때까지 방안을 중얼거리면서 왔다갔다 했다.
돔 골목길 5번지의 모차르트하우스
돔 골목길 5번지의 모차르트하우스는 음악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7살의 베토벤은 모차르트의 명성을 듣고 독일 본에서 14일간의 마차 여행 끝에 빈을 찾아온다. 베토벤은 이 집에서 모차르트를 만났고 그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최고의 찬사를 했다. 동시대의 위대한 음악가 하이든 역시 이 집을 방문한다. 18~19세기 위대한 음악가 3인이 흔적을 남긴 집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21번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피아노협주곡 21번 2악장은 1967년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영화명이 별칭이 되었다.
기자가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도를 든 사람들이 연달아 모차르트하우스 앞을 서성거린다. 2006년 1월 27일부터는 박물관 모차르트하우스로 문을 연다. 입장료는 9유로. 비록 비참한 말년을 보냈지만 모차르트가 이 집에 살면서 한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그래도 덜 미안하다.
모차르트는 돔 골목길에서 교외로 이사를 했다. 란트-하우프트가(街) 75~77번지. 모차르트가 1787년 4월부터 1787년 12월까지 9개월을 살았던 집이다. 그는 이 집에서 오페라 ‘돈 조반니’를 썼다. 지금은 아파트로 변한 이 공동주택의 현관으로 들어서자 모차르트 얼굴이 벽에 부조(浮彫)되어 있다.
1788년 모차르트는 빈 교외의 집, 베링게르가 26번지에서 교향곡 39·40·41번을 비롯한 수많은 기악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월세로 이 집에 들어왔다. ‘시내 나가기가 어렵지만 봄 여름 가을 동안 정원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풍광이 좋다’고 편지에 썼다. 지금은 지하철 2호선 쇼텐트역에서 내려 전차를 갈아타면 금방이다. 전차에서 내려 베링게르가를 걷고 있는데 눈발이 더 거세진다. 1788년, 모차르트는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했던 시점이 아닌가. 가장으로서 그의 인생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겨울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집으로 이사온 첫날밤 프리메이슨 동지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쓴다.
“아시겠지만 분할대금을 받아서 살다보면 다음번 돈이 나올 때까지는 참 어렵거든요. 아니 생활해나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지요. 얼마간이라도 모아둔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역시 무일푼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그러나 이번에 호의를 베풀어주시면 저로서는 우선 급한 지출을 적당한 때에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은 지불을 미룰 수 있는 한 미뤄온 상태라 수입이 들어와도 바로 빼앗겨버리기 때문에 상황이 아주 안좋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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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가 걸었던 그 길을 걷고 있는 순간 눈발에 실려 들려오는 교향곡 선율을 들었다. 그것은 교향곡 40번 G단조였다. 기자가 40번 교향곡을 허밍하자 모차르트 전문 가이드 역시 따라했다. 우리는 교향곡 40번을 읊조리면서 걸었다. 추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옛날 집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 자리에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오페라 코시 판 투테와 교향곡 39~41번을 작곡했다’라는 안내판만이 반긴다. 돈을 구걸하는 비굴한 편지를 써야만 했던 그 손으로 모차르트는 어떻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을, 그것도 단 10주 만에 쓸 수 있었을까. 그 앞에 서니 40번 G단조는 더 큰 볼륨으로 울려왔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신비한 전율이었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음악은 살아 있었다.
고향을 떠나 위대해진 모차르트
빈 서부역에서 잘츠부르크행 기차를 탔다. 열차표를 사니 317㎞의 거리라고 찍혀나온다. 18세기 잘츠부르크~빈은 마차로 6일이나 걸렸지만 21세기의 우리들은 3시간10분 만에 가는 거리다. 모차르트가 음악가로서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잘츠부르크와 과감히 결별을 선언했기에 가능했다.
그가 종교권력이 주는 안정된 삶을 거부한 채 빈에 온 것은 1781년. 빈에서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며 황금기를 열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음악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생활하는 이런 상황은 그를 후대(後代)에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게 했지만 당대(當代)에는 비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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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마차를 타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가는 천재 음악가의 여정을 생각해본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는 종교권력의 권위주의에 숨막혀 했다. 잘츠부르크 궁정악장 시절을 모차르트는 ‘군주 밑에서의 종살이’라고 표현했다. 모차르트는 요리사나 시종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푸대접을 받았고 대주교는 음악가 하인이 앞문으로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 뒷문 출입을 명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당당히 앞문으로 출입했고 이것이 대주교의 미움을 사 궁정악장직에서 해고된다. 모차르트는 빈으로 온 직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하느님만이 아실 거예요. 제가 아버지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하지만 밥을 빌어먹더라도 절대로 또다시 그런 군주 밑에서 종살이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일은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잊혀지지 않을 모욕이었으니까요.”
35년 인생의 25년을 보낸 곳, 잘츠부르크. 이곳은 모차르트가 살았던 18세기와 거의 변함이 없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 잘츠부르크 인구는 1만5000명. 특히 생가가 있는 구시가는 250년 전 그대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구시가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개발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어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인구는 15만명으로 늘어났지만 주로 잘자흐강 건너편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는 유년의 학습기(1756~1774)와 작품 성숙기(1774~1781)로 구분되곤 한다. 유년의 학습기는 생가에서 살던 시절을, 작품 성숙기는 보통 ‘모차르트 저택’으로 불리는 마카광장 8번지에서 살던 때를 각각 말한다. 게트라이더 생가가 너무 비좁자 아버지 레오폴트는 잘자흐강 건너편, 마카르트 광장의 집으로 이사왔다. 1774년 이후 이 집에서 모차르트 누나 난네를이 1784년 결혼할 때까지 살았고 아버지 레오폴트가 1787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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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생가에서 만난 생과 사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50곡 이상을 작곡했다. 널리 알려진 곡이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하프너 세레나데, 바이올린 협주곡 K216 등이 있다. 이 집에서는 음악가 가족의 단란한 가족애가 느껴진다. 모차르트가 뮌헨에서 잘츠부르크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1780년 11월 15일)와 역시 뮌헨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1775년 1월 14일), 아버지 레오폴트가 딸에게 보낸 편지(1787년 3월) 등이 있다. 모차르트 가족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고 이것이 결국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다. 이 집에는 난네를이 쓴 일기장(1780년 9월)도 전시돼 있다. 난네를의 일기를 통해 18세기 생활상이 그대로 복원된다.
모차르트가 1780년 무렵 사용한 포르테(forte)피아노도 눈길을 멈추게 한다. 안내원은 “모차르트는 이 포르테피아노로 수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고 설명한다. 이 집에서는 모차르트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게 있다.
밀로스 포먼 감독이 연출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모차르트는 장난기가 많았고 실제로 언행이 천진난만했다. 종교권력이 개인의 사생활조차 간섭할 만큼 엄격했던 18세기의 사회 분위기에 비춰보면 모차르트는 별종으로 보였을 법하다. 이 집에는 일종의 표적 맞히기 게임 그림이 세 개가 붙어있다. 모차르트가 즐겨했던 놀이다. 그가 1777년 11월에 보낸 편지에서 묘사된 대로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고 한다.
구시가의 300년 이상된 건물에는 전부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주교가 살았던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내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면 16~18세기 종교권력의 가공할 파워를 몸서리치게 체험하고도 남는다. 어린 모차르트는 이 성채에 갇혀 깊은 밤 무서움에 떨며 작곡하곤 했다.
생 피터스 교회는 모차르트가 1783년 C단조 미사곡을 처음으로 연주한 곳이다. 모차르트는 2층에서 직접 오르간을 연주했다.
아버지와 소원한 관계였던 모차르트는 미사곡 연주를 위해 잘츠부르크를 방문하면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다.
모차르트 흔적 찾기의 하이라이트는 생가(生家)에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 아버지 레오폴트가 쓴 바이올린 교본을 보며 켰던 바이올린, ‘마술피리’를 작곡할 때 사용한 피아노 전신인 클라비코드(clavichord)도 모차르트 팬들의 발길을 오래 붙든다. 클라비코드에는 콘스탄체의 친필 확인서가 붙어 있었다.
기자는 생가의 전시물 중 ‘탄생과 죽음’이라는 코너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성당교구의 통계에 따르면 잘츠부르크에서 1751~1760년에 1795명이 태어났고 이 중 1071명이 열 살 이전에 사망했다.
모차르트 부모는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다섯을 잃고 모차르트와 난네를만이 살아남았다. 영아 사망률이 60%에 달하던 시절에 모차르트는 가까스로 생존했다. 모차르트는 아홉 살 때 다시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지만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역시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이 중 두 아들만이 살았다. 이것을 보면 모차르트가 35년을 산 것만으로도 기적이고 신의 섭리가 작용했던 것이 아닐까. ‘모차르트 평전’을 쓴 필립 솔레르스가 그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 해석을 내렸던 게 생각났다.
“신은 우리에게 그를 보내주었다가 다시 데려갔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빈ㆍ잘츠부르크 = 글ㆍ사진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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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626곡, 영화로 다시 듣는다
서양의 고전음악사를 돌아봐도 그렇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활동했던 바로크 시대에는 아직 교향곡 같은 소나타 형식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다. 교향곡이 꽃 피웠던 고전파 시기의 주요 작곡가들은 거꾸로 오페라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악성(樂聖)’ 베토벤조차 오페라는 ‘피델리오’ 한 편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 뒤 이어진 낭만파 시기에는 자기 전문 분야로 특화가 더욱 심해졌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대표적이다. 치우침 없이 오케스트라와 독주곡, 기악과 성악, 심지어 종교 음악까지 골고루 걸작을 남긴 작곡가가 바로 모차르트다. 그렇기에 ‘모차르트로 향하는 길’은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속의 장면에 흐르던 곡을 통해 모차르트로 가는 접근로를 살펴본다. 영화 ‘아마데우스’와 교향곡 25번 하인들은 식사를 들고 방문을 두드리지만 방안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주인님, 대답하지 않으면 우리가 다 먹겠어요.” 농담을 하지만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새나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피투성이의 노인이 이름을 외치며 쓰러진다.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의 첫 장면. 작곡가 샬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죽음에 빠뜨린 죄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병원에 실려간다. 긴박감이 넘치는 이 장면에서 삽입되는 음악이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 1악장. 모차르트가 남겼던 41편의 교향곡 가운데 일부일 뿐이지만 영화 ‘아마데우스’를 기억하는 관객의 뇌리에 박혀버린 멜로디다.
정식 번호가 붙어있는 41편의 교향곡에 곧바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CD로만 대략 19장 분량. 번호가 붙지 않은 관현악곡은 더 많다. 이 때문에 모차르트의 관현악이 흠뻑 무르익은 30~40번대의 중·후기 교향곡이 자주 연주되는 편이다. 이 시기의 교향곡에는 유럽 각국의 도시 이름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교향곡 31번 ‘파리’, 35번 ‘하프너’, 36번 ‘린츠’, 38번 ‘프라하’ 등이 대표적이다. 모차르트가 작품 발표나 연주를 위해 방문했던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도시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 작품부터 출발하면 좋다. 최후의 3편인 교향곡 39~41번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걸작이다. 교향곡 41번에 붙어있는 별명은 로마 신화에서 최고의 신을 뜻하는 ‘주피터’.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녹음한 명(名)지휘자로는 브루노 발터, 칼 뵘,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등이 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클라리넷 협주곡
이들이 아프리카의 대자연에서 사랑을 확인하고, 탐험을 떠났던 데니스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불과 2개월 전의 작품인데도 구름 한 점, 티끌 하나 찾기 힘들 만큼 영롱하다. 피아노 협주곡 27곡, 바이올린 협주곡 5곡과 호른 협주곡, 바순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과 플루트 협주곡까지. 이 가운데는 정확한 작곡가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곡도 있지만, 모차르트는 협주곡에서도 다양한 악기를 독주 주자로 등장시켰다. 27곡에 이르는 피아노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당시 유럽의 왕정을 휩쓸고 다녔던 인기 연주자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곡들이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삽입됐던 피아노 협주곡 21번이나 20번을 먼저 들으며 접근하면 좋다. 숨지기 직전까지 모차르트에 천착했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의 음반을 피아노 협주곡의 명연주자로 꼽는다. 13세의 소녀로 카라얀에게 발탁된 이후 정상의 자리에서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는 모차르트 250주년을 맞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전곡(5곡)을 최근 음반으로 내놓기도 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과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어느날 기증 받은 레코드 가운데 끼어있던 음반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앤디는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이 음반을 튼 뒤, 마이크를 통해 교도소 전체로 방송해 버린다. 동료 죄수들은 “이탈리아어는 하나도 몰랐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멜로디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쇼생크는 모두 자유를 느꼈다”며 행복해 한다. 앤디는 2주간의 독방 생활을 벌로 받게 된다. 죄수들의 말문을 막아버린 이중창이 ‘편지의 이중창’. 알마비바 백작의 바람기에 고통받는 백작부인 로지나와 시녀 수잔나, 두 소프라노가 부르는 아름다운 이중창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도 자유에 대한 염원과 아름다운 음악이 어루어진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런데 왜 하필 ‘피가로의 결혼’일까. 오페라의 줄거리를 훑어보면 꽤 복잡한 복선이 영화에 깔려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백작 부인과 수잔나는 백작을 유인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 위해 이중창을 부르며 편지를 쓴다. 오페라 종반부에 편지를 받고 수잔나와의 밀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알마비바 백작은 여인에게 반지를 끼워주지만 알고보니 수잔나의 옷을 입은 백작부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반발과 귀족 사회에 대한 정치 풍자가 유쾌하게 버무려져 있는 작품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감옥 생활에 적응하려던 앤디는 자신의 무죄 입증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교도소 내부의 비리를 폭로하고 멋지게 탈출한다. 핍박받던 자가 핍박하는 자를 조롱하는 영화의 내용은 오페라와 꼭 닮아있다. 영화에서도 극적 반전을 암시하는 대목이 바로 모차르트의 이중창으로 처리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는 당대 시대에 대한 유쾌한 풍자와 반전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 때문에 시대 배경을 현대로 바꿔도 별 무리없이 즐길 만하다.
모차르트 오페라는 ‘다 폰테 3부작’으로 불리는 중·후기작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대본을 쓴 작가. 요즘 대중가요 식으로 따지면 다 폰테는 작사가, 모차르트는 작곡가인 셈이다. 모차르트가 그와 짝을 이뤄 협업한 작품으로는 ‘여자는 다 그래’로 흔히 번역되는 ‘코지 판 투테’와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가 유명하다. 전곡을 들으려면 2~3시간에 훌쩍 이르기 때문에 처음엔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접근하는 것도 방법. 유명 아리아와 서곡으로 작품의 맛을 익힌 뒤, 용기를 내어 전곡 영상물(DVD)이나 음반에 도전하자. 처음엔 아리아들이 귀에 먼저 들어오지만 모차르트 오페라의 정수는 ‘중창’에 숨어있다. 등장 인물들이 제각각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대사와 멜로디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데 모차르트 오페라의 묘미가 깃들어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도 빼놓을 수 없는 걸작. 한국에서는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 ‘지옥의 복수심이 내 가슴 속에 끓어오르고’로 너무나 유명하다. 초절정 기교가 필요한 ‘밤의 여왕’ 역을 가장 잘 소화하는 소프라노 가운데 하나가 한국의 조수미다. 모차르트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는 칼 뵘, 에리히 클라이버 등이 유명하며 최근에는 작품 당시의 연주 방법으로 원전(原典)의 맛을 살리는 ‘정격 연주’가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 지휘자 르네 야콥스의 음반이 대표적이다.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 ‘레퀴엠’
하지만 ‘눈물의 날(Lacrimosa)’의 음표를 새겨넣던 붓끝은 끝내 멈추고 만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이 바로 ‘레퀴엠’이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은 스스로를 위한 진혼곡으로도 해석된다.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 앞에는 보통 ‘K’라는 약호가 붙는다. 나중에 그의 작품을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번호를 붙인 쾨헬의 이름을 딴 것. 하지만 쾨헬 이후에도 많은 작품들이 발견됐다. 모차르트의 최후작인 레퀴엠은 K.626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해석되는 ‘키리에(Kyrie)’부터 ‘분노의 날’로 불리는 ‘디에스 이래(Dies irae)’, ‘눈물의 날’까지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 음반사 EMI는 최근 100곡의 유명 곡을 음반으로 묶어서 저렴한 가격에 펴내는 ‘100 시리즈’를 발매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작곡가로는 유일하게 모차르트가 ‘베스트 모차르트 100’이라는 음반명으로 포함돼있다. 그만큼 장르별로 히트곡이 많다는 뜻도 된다. 이 같은 발췌 음반을 통해 모차르트 음악의 윤곽을 파악한 뒤, 교향곡·협주곡·관현악곡·독주곡·실내악오페라·성악곡 등 친숙한 장르부터 출발하면 좋다. 모차르트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매력에 빠질 수 있도록 커다란 웅덩이를 곡의 곳곳에 파놓았다. 처음부터 섣불리 전곡(全曲)에 도전하는 건 시간과 정력 낭비. 어쩌면 발췌 음반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가 모차르트일지 모른다.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danpa@chosun.com) 성공비결은 ‘유목민 정신’과 ‘블루 오션 개척’
아홉 살에 교향곡을, 열두 살에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해 불과 서른다섯 해를 살면서 626개의 번호 붙은 작품을 비롯해 거의 1000여곡을 남긴 천재. 기악과 성악, 종교음악과 오페라를 불문하고 클래식 음악의 전 장르에 걸쳐 이룩한 빛나는 성과. 그가 태어난 오스트리아 산골 마을 잘츠부르크를 1920년 제1회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현대음악 축제의 발상지로 만들었으며, 매년 수많은 관람객과 최정상의 아티스트를 불러모으는 매력. 심지어는 ‘모차르트 효과’ 학설까지 만들어낸 작곡가. 과연 모차르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정답부터 얘기하자면 ‘유목민 정신’과 ‘블루오션의 개척’이다. 그는 당시에 쉽지 않던 순회 연주여행을 통해 어릴 때부터 유럽의 음악적인 특징과 성과를 한몸에 익힐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영역을 개발하고 다져놓았다. 모차르트는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인 것만은 아니며, 18세기 후반 유럽에 만연한 화려한 로코코 양식과 계몽의 물결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내 장차 도래할 독일 낭만주의의 시대를 개척한 준비된 음악가였다. 교회나 절대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했던 모차르트는 원했건 그렇지 않았건 향후 작곡가들이 일하는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빈에 자리잡았던 만년(1781~1791)에 그는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고, 사적·공적 ‘아카데미’(예약 음악회)와 위촉에 의한 것이거나 흥행을 위한 작곡 등에 의해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적절한 관용을 통해 피지배 세력의 반감을 완화시키려 했던 지배계급은 증가하는 오락과 문화 수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이는 곧 프리랜서 작곡가가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형성시켰고, 모차르트는 그 초기에 가능성을 시험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 첫 수혜자가 루트비히 반 베토벤(1770~1827)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우선 ‘노마드(nomad)’ 모차르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잘 알려진 것처럼 모차르트의 유목민 정신은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교육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의 선배인 바흐가 평생 독일 중부의 안할트 작센 지방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나, 헨델이 주군(主君)의 명을 어기고 영국에 머물다가 뒷날 그가 영국의 조지 1세가 되자 화(禍)를 면하기 위해 ‘수상 음악’을 작곡했다는 등의 에피소드를 알고 있다. 이들은 온 유럽의 수도를 자신의 안방처럼 드나들던 이탈리아 음악가들과는 사뭇 다른 처지였다. 그러나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시골에서 썩힐 수 없다고 생각한 레오폴트의 신념과 음악을 좋아하고 너그러운 성품이던 잘츠부르크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 백작의 배려로 어린 볼프강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연주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가 여섯 살 때인 1762년에 시작된 여행은 그때까지는 물론이고, 요즘이라도 좀처럼 꿈꿀 수 없는 다채롭고 강도 높은 것이었다. 그 여정은 다음과 같다. 영혼을 깨운 이탈리아 여행
이 초기여행은 흔히 곡마단 원숭이의 공연에 비유되며 뒷날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들의 돈벌이 행각을 잇따르게 했다.(그 최대 희생자는 곧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다.) 단순히 베르사유나 쇤부른과 같은 유럽 최고의 궁전과 드높고 웅장한 교회를 볼 수 있었다는 것 외에 이동 중에 마차 창 밖으로 보았을 천혜의 자연과 계절의 변화, 기착지마다 겪었을 다양한 서민의 인생사는 음악 이면(裏面)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의 성과가 어린 모차르트의 감수성에 얼마나 심대하게 작용했을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하물며 각국의 언어 습득은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모차르트의 진정한 음악교육은 괴테가 그랬듯이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1768년 빈을 방문해 첫 오페라인 ‘바스티안과 바스티엔’을 작곡했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잠시 머문 모차르트 부자는 첫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한다. 어린 모차르트는 밀라노에서 만난 작곡가 잠바티스타 삼마르티니와 볼로냐의 마르티니 신부(神父)에게 최첨단 음악을 전수받는다. 피렌체, 로마, 나폴리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어린 모차르트는 오페라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K87), ‘알바의 아스카니오’(K111), ‘루치오 실라’(K135)를 차례로 작곡한다. 이를 통해 그는 오페라의 종주국에서 배운 것을 체화(體化)한다. 유목민 모차르트의 청년기를 결산하는 마지막 수업 여행은 1777년에 이루어진다. 이때는 그 전까지 남편과 아이들(볼프강과 그의 누이 난네를)을 떠나보내고 ‘기러기 엄마’ 처지로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던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가 동행한다. 어머니와 함께 떠난 모차르트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탁월한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보유한 독일 만하임 궁전을 방문해 그곳 음악가들과 교류한다. 이어 파리를 찾은 모차르트는 인생에 있어 첫 번째 심대한 시련인 모친의 사망을 맞게 된다. 상심하여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그를 기다린 것은 음악에 대한 이해도, 인정머리도 없는 새 주교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주교의 임명장이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하고 하인처럼 부린다. 예속 예술가로서 겪게 되는 모멸감의 시작이었다. 모차르트를 ‘한때 잘츠부르크에 살던 반짝한 작곡가’가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클래식 음악의 아이콘’으로 만든 계기는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K366)의 작곡이다. 뮌헨의 사육제를 위해 위촉받아 작곡한 이 작품은 그곳을 방문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귀족 판 스비텐 남작의 눈에 띈다.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남작의 추천과 주교를 견제하려는 계몽군주 요제프 2세의 뜻이 맞아떨어져 모차르트는 마침내 고향을 떠나 빈에 정착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빈은 이 1781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791년까지 10년 동안 모차르트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영구(永久)한 음악의 수도로 발돋움하게 된다. 유랑의 연속, 유럽음악의 총결산
많은 사람들이 “왜 현대 작곡가는 모차르트처럼 곡을 쓰지 않는 거야?”라고 말할 만큼 그의 작품은 동서양 연령층을 불문하고 쉽고 기분좋게 이해된다. 그러나 오늘날 귀를 즐겁게만 하는 모차르트의 곡들도 작곡 당시에는 마찬가지로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18세기 무렵 독일 대부분 궁정악단의 요직은 이탈리아 음악가들로 채워져 있었으며, 알프스산맥 이남(以南)의 것이 진정 선구적인 것이고 귀감으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심지어 레오폴트 모차르트조차 그토록 꿈꾸던 악장직(職)을 평생 이탈리아 연주자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어쩌면 그가 신동인 아들을 데리고 평생 떠돌았던 것도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좌절감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토록 유럽 전역을 주름잡은 이탈리아 작곡가들도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모차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모차르트의 유랑 정신이 진정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수업여행을 통해 얻은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의 앞선 양식과 형식에 독일 정신을 접목했다는 점이다. 독일은 오랜 세월 문화지체에 빠져있었지만, 18세기 중반에 들어 문예사조 전반에 걸쳐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레싱과 헤르더에 이어 젊은 괴테가 눈을 뜨던 시기다. 모차르트는 유럽 음악계에서 미개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던 독일의 정신과 가치를 부각시킨 진정한 유목민인 것이다. 그러면 이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모차르트는 자신이 배워온 신문물을 재가공하는 과정에서 장르 자체에 혁신을 꾀했다. 모차르트에 의해 교향곡은 연주회나 오페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보조수단이 아닌 진정한 예술적 실체로 우뚝 서게 된다. 그는 바겐자일, 반할 등이 시도했던 바로크 양식과 소나타 형식의 결합을 적극 받아들여, 교향곡의 3악장 미뉴에트(minuet, 4분의3 박자의 춤곡)에 트리오를 삽입한 4악장으로 구성을 확립했고, 오보에와 호른 외에 플루트와 바순, 트럼펫과 팀파니를 편성에 추가했다. 무엇보다 하이든의 단조 교향곡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모차르트의 표현의 깊이를 말할 수 없이 깊게 만들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작곡한 교향곡은 모두 여섯 편으로, 피날레를 향해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건축적이고 조화로운 양식은 진정 기념비적인 것이다. 그 덕분에 향후 독일의 교향곡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어느 작곡가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루지 못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모차르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각 가정과 살롱, 음악회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하는 시기를 살았다. 이전의 쳄발로에 비해 풍부한 셈여림의 표현이 가능해졌고, 소나타 양식을 구현하고 명인기(名人技)를 가진 연주자의 출현을 가능케 한 악기가 곧 피아노이며, 모차르트는 평생 이 악기와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그가 남긴 30여편(다른 사람 곡의 편곡 포함)의 피아노 협주곡은 독주 피아노와 관현악이 긴장과 융합을 거듭하게 했다는 점에서 근대 교향악적인 협주곡의 모태가 된다. 바로크 시대 빠른 두 악장 사이의 경과구 역할에 그쳤던 느린 악장을 중요시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2악장 ‘로망스’나 영화 ‘엘비라 마디간’으로 유명한 21번의 2악장 등은 가깝게는 베토벤, 멀리는 말러의 느린 악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피아노 협주곡에 등장하는 관악 합주(하르모니무지크)는 당시 빈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의 오페라 속 등장인물들이 엮어 내는 앙상블과 같이 아기자기하다. 미지의 시장 ‘국민 오페라’ 개척
실내악에 남긴 업적 또한 괄목할 만하다. 모차르트는 드물게 현악 5중주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여섯 편의 현악 5중주는 1번을 제외한 모두가 빈 시절에 씌어졌다. 모차르트는 이 영역에서 125개의 현악 5중주를 남긴 보케리니를 모델로 삼았다. 그와 다른 점은 편성에 있어 첼로가 아닌 비올라를 추가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악 4중주에서 시도된 선율의 응집력과 유연성이 더욱 확고해졌다. 이 장르의 가치는 베토벤도 아닌 슈베르트의 만년에 가서야 비로소 다시 평가되니 모차르트의 앞선 혜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남긴 스물세 편의 현악 4중주 중 빈에 정착한 뒤 남긴 열 곡은 궁핍한 생활 속에 씌어진 보석 같은 예술이다. 특히 하이든의 Op33을 듣고 감동해 작곡했고, 그에게 헌정된 ‘하이든 사중주’ 전6곡은 고전주의 소나타 양식의 완성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하이든은 이 곡을 들은 뒤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전한다. “성실한 인간으로 신 앞에서 맹세코 말하지만 당신의 자식은 제가 직접, 또는 평판으로만 알고 있는 작곡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훌륭한 감각과 매우 뛰어난 작곡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뻘되는 하이든과 나눈 우정은 모차르트의 인생 속에서 무척 예외적인 요인 중 하나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그의 자신감은 당대 많은 평범한 예술가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이든은 거의 평생을 에스테르하지 공(公)의 악장으로 매여 있었던 구시대적 인물이었고, 모차르트는 그가 간 길이 대부분 처음이 되었던 프리랜서 예술가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사회의 질서와 규율을 무시한 철부지 어린애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당시 유럽 상류층에 파고들었던 프리메이슨 결사의 일원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세 석공(石工)들의 모임에서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 모임이 일설처럼 프랑스혁명이나 미국 독립 등의 산파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모차르트가 이 결사에 가입해 승격을 위한 관문을 거쳤음은 그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직인(職人, Gesell)’의 모임인 ‘사회(Gesellschaft)’라는 오케스트라 속에 하나의 악기로서 기능을 하고자 했던 그의 이상은 만년의 오페라인 ‘마술피리’에 잘 녹아 있다. 통과의례를 통해 성숙한 시민이 되고자 했던 모차르트에게 시대는 너무 가혹했던가? 궁핍한 프리랜서의 삶으로 일관하다 비참하게 가버린 천재. 빈에서의 10년이 조금만 더 연장되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기대감은 훗날 베토벤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1792~1868)가 사실은 죽은 것으로 위장한 모차르트가 뒤에서 조종한 꼭두각시였을지 모른다는 그럴 듯한 픽션을 낳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토록 모차르트는 19세기에 만개할 모든 음악 장르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또한 전속의 개념을 벗어던지고 개인의 예술적 충동에 생계를 맡긴 최초의 예술가였다. 모차르트는 그의 듣기 편한 음악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가도 그 예술의 가치가 마르지 않고 늘 새로운 것이다. 2006년 그의 탄생 250주년이 가고 나면, 오래지 않아 2020년 잘츠부르크 축제 100주년이 또 한번 그를 기리고 찬양할 것이다.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hanno21@hanmail.net) “모차르트는 우주의 우연이 낳은 천재”
한국에서 손꼽히는 모차르트 전문가인 지휘자 이윤국(52)씨의 말투는 경쾌하고도 단호했다. 극중 돈 조반니의 시종인 레포렐로가 부르는 아리아 ‘이게 내 주인이 사랑한 여인들의 명단’은 흔히 ‘카탈로그의 노래’로 불린다. 이탈리아에서 61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 100명, 터키에서 91명 등 돈 조반니가 농락한 여인들의 숫자가 운율을 타고 노랫말로 적나라하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씨는 “지휘도, 연주도 랩처럼 경박할 만큼 흥겹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의 음악 인생은 모차르트와 떨어질래도 떨어질 수 없다. 13세 때 미국 뉴욕으로 가족과 함께 건너가 과학고를 졸업한 이씨는 윌리엄스 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과학도 출신의 음악가인 셈.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학교에서 지휘와 작곡을 수학한 이씨는 모교(母校)인 모차르테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3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모차르트 전문가가 말하는 모차르트의 매력은 뭘까. “개인적으로 우주의 우연을 믿지 않지만, 딱 한 번의 우연이 있었다면 모차르트의 탄생이라고 생각해요. 레오폴드 모차르트라는 당대의 음악가를 아버지로 뒀던 집안 배경부터, 어려서부터 유럽을 돌아다니며 연주활동을 했던 재능까지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음악인입니다.” 전문가치고는 상투적인 정답을 늘어놓는 것 아닐까? “지금은 라디오나 음반을 통해 매일 들을 수 있으니 그의 천재성을 제대로 만끽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당대의 2류 작곡가와 한번 비교하면서 들어보세요. 듣는 이와 밀고 당길 줄 아는 놀라운 심리전이 펼쳐집니다.” 우리가 이 천재 작곡가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남아있을까. 이씨는 “아직 많다”고 말했다. “모차르트는 작곡을 할 때 늘 ‘1번 연주’의 효과를 노렸습니다.” 무슨 뜻일까. “당시엔 음반도, 방송도 없었어요. 콘서트에서 듣는 대부분의 음악은 신곡이었습니다. 따라서 단 한 번만 들어도 청중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음악적 효과를 계산하며 세심하게 곡을 만들어나간 거지요. 청중은 모차르트의 콘서트에 앞서 ‘오늘은 또 무슨 곡일까’라고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이씨는 모차르트가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부터 세레나데까지 모차르트가 얼마나 많은 경음악(輕音樂)이나 잔치용 음악을 썼는지 아십니까. 교향곡과 협주곡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실제로도 귀족보다 당대의 대중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때 ‘모차르트 효과(Mozart Effect)’가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모차르트를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얘기가 모차르트 효과의 핵심이다. 사실일까? “지능지수를 올릴 수 있다는 속설은 믿지 않아요. 하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은 수학적이며 논리적이기 때문에 뇌를 한번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묵은 찌꺼기를 씻어주는 역할은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은 클래식 음악이 고전(古典)이지만 당시엔 유행 음악이었다”면서 “당대의 음악을 당대의 방식으로 해석할 때 우리의 현대음악에 대한 힌트도 찾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이씨는 피아노 협주곡 27곡이야말로 작곡가의 인생이 녹아있는 ‘음악 자서전’이자 모차르트로 다가갈 수 있는 ‘접근로’라고 했다.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모차르트의 변화를 모두 느낄 수 있어요.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 삽입됐던 피아노 협주곡 21번 2악장에선 달콤함을, 피아노 협주곡 20번에선 대조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지요.” 1992년부터 잘츠부르크 캄머 필하모니의 창단을 주도해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씨는 ‘모차르트 해’에 폴란드, 프랑스 등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잘츠부르크 캄머 필하모니와 함께 초청받아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게 된다.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danpa@chosun.com)
오스트리아는 지금 '모차르트 세일' 중
탄생 250주년, 헬로!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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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가족이 인종ㆍ국적ㆍ연령ㆍ성별에 관계없이 열광하는 스포츠는 단연 축구다. 똑같은 어법으로 지구촌 가족이 인종ㆍ국적ㆍ연령ㆍ성별에 관계없이 매일 듣는 음악은 단연 모차르트다.
천재 모차르트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FM 라디오가 아니더라도 영화음악에서, 대형서점에서, 피자집에서, 큰 건물의 로비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온다. 18세기 인물인 모차르트가 쓴 작품은 19세기와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하루 한 시간도 빠짐없이 떠다닌다.
2006년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태(胎)를 묻은 지 250주년이 되는 해다. 1756년 1월 27일 호엔잘츠부르크 성채 바로 아래 게트라이더 골목길 9번지 노란색 집에서 태어난 모차르트.
오스트리아는 2006년을 ‘모차르트 해’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범국가적으로 준비해왔다. 탄생 250주년 축제의 중심지는 빈과 잘츠부르크다. 빈과 잘츠부르크 시내를 걸으면 모차르트가 넘쳐난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해’를 위해 도시 전체를 개조하는 데 7000만유로를, 빈은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3000만유로를 각각 투입했다.
빈 중심가의 서점 진열장에는 아예 모차르트 관련 서적 수십 권만을 진열해놓고 있었다. 현재 구입가능한 영어 프랑스어 독어로 된 모차르트 전기 수는 모두 47권. 한국어로 번역된 전기, 평전 등을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모차르트가 비즈니스에 가장 널리 애용되는 분야는 뭐니뭐니해도 ‘먹고 마시는 분야’다. 그 유명한 미라벨 모차르트 초콜릿은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이제 안파는 가게가 없다. 잘츠부르크에는 대량 생산하는 미라벨 초콜릿 외에도 하나씩 손으로 싸서 만드는 은색 포장지의 퓌어스트 초콜릿도 있다. 값은 한 개당 1유로가 넘는다.
카페의 도시 빈 중심가에는 유명한 모차르트 카페가 있다. 물론 커피 메뉴에도 ‘모차르트 커피’가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커피를 시키면 커피잔, 받침접시, 냅킨 등 모든 부속물에 모차르트 그림이 새겨져 있다. 빈을 처음 찾는 외국인이 어떻게 모차르트 카페를 찾지 않고 또 모차르트 커피를 주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차르트 카페가 아니더라도 모든 카페는 ‘모차르트 커피’를 팔고 있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여전히 영화 주제음악으로 가장 많이 애용된다. 피아노협주곡 21번이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음악으로 사용된 것을 비롯해 모차르트 작품을 배경음악으로 쓴 대작 영화는 자그마치 47개나 된다.
2005년 11월 말 1주일간의 빈·잘츠부르크 취재 중에 만난 모차르트 행사 전문가들에게 공통으로 물어본 질문이 이것이었다. ‘빈 모차르트 해’ 조직위원장 프란츠 파타이는 “그걸 누가 계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자를 빈에서 이틀 동안 안내한 모차르트 전문가이드 라이너 레훼브는 “수십조달러는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저의 4중주곡을 단돈 몇 푼에 팔아넘겨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피아노 소나타들도 순전히 팔아먹기 위한 것들입니다”라고 쓴 1790년 6월 12일자 편지처럼 모차르트는 곡을 써서 돈 받고 팔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음악의 저작권은 저작권 소유자의 사후(死後) 50년까지 유효하다. 만일 모차르트가 저작권법이 있을 때 태어났다면 그의 자손들까지 저작권법의 혜택을 받는다는 의미다. 모차르트는 부인 콘스탄체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지만 이들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결국 모차르트 가문은 그 아들대에서 끊기고 말았다. 오스트리아 어디에도 모차르트 후손이 없다.
모차르트 얼굴을 넣은 초콜릿을 만들거나 커피를 팔아 아무리 큰돈을 벌어도 제조회사나 카페는 누구에게도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아니 지불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다. 마찬가지로 빈 필 오케스트라나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도 돈을 십원도 안내고 마음대로 모차르트곡을 연주한다. 다만 음반회사에서 빈 필이 연주한 교향곡 41번(주피터)을 쓰고 싶을 경우 빈 필에 돈을 낼 뿐이다.
알려진 것처럼 말년의 모차르트는 고리대금까지 써야할 만큼 곤궁했다. 돈을 돌려막는 일도 있었다. 묘지를 살 돈도 없이 비참하게 죽었기에 그는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 내 시신 여러 구를 한꺼번에 파묻는 샤흐트 구역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18세기의 35년을 산 모차르트. 그 자신은 당대에 돈도 명예도 없이 영광을 누릴 후손(後孫)조차 남기지 않고 갔다. 어떻게 한 인간이 이렇게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주고 갈 수가 있을까. ‘모차르트 평전’을 쓴 프랑스 작가 필립 솔레르스가 한 모차르트 전문가에게 물었다.
“모차르트가 저작권료를 받는다면 얼마나 될까요?”
이 전문가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스트리아를 통째로 살 수 있을 겁니다.”
오스트리아는 그후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뚜렷한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에서 찬란한 역사의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하고, 오스트리아에 와서 캥거루를 찾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잘츠부르크는 그동안 유럽에서는 모차르트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역에서는 줄리 앤드루스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찍은 도시로 더 알려져 있었다. 유럽의 수많은 도시 중 ‘모차르트 길’을 갖고 있는 도시가 200개라는 사실은 유럽인들이 모차르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웅변한다.
잘츠부르크 공항의 별칭은 ‘아마데우스 공항’이다. 또 잘츠부르크 공항은 관제탑을 비롯해 공항 내부 여러 곳에 ‘잘츠부르크 공항-W. A. MOZART’라고 표기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주정부와 잘츠부르크 시당국은 ‘모차르트 2006’을 계기로 ‘잘츠부르크=모차르트’라는 인식을 세계인에 각인시킨다는 생각이다.
2006년은 오스트리아엔 특별한 의미가 있다. 2006년 상반기 오스트리아는 EU(유럽연합)의 순회 의장국이 된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같은 절묘한 기회를 계기로 수도 빈을 유럽 예술활동의 중심지로 확실하게 부각시킨다는 계획이다. 21세기의 코드는 문화라는 사실을 지금 우리는 오스트리아와 모차르트에서 확인하고 있다.
빈ㆍ잘츠부르크 = 글ㆍ사진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
증성자 (證聖者)의 장엄한 저녁 기도, 참회의 엄숙한 저녁 기도 In C major k.339 (1780) 중
제5곡 'Laudate Dominum-주를 찬양하라'
Mozart, Wolfgang Amadeus (1756-1791 A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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