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ano Pavarotti

[스크랩] “테너 파바로티의 生涯”

schubert 2007. 11. 26. 16:51

“테너 파바로티의 生涯”
崔 建 次

지난 초여름, 나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강릉해수욕장 입구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에 갔었다. 그곳에는 음반에 관한한 다양한 모든 것들과 토마스 에디슨의 발명품 그리고 세계적으로 희귀한 음반들이 전시되어 있어 시청각교육으로 한번 쯤 가볼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곳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대중가수 부라이언 아담스와 세기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오 쏠레미오’를 대형 입체화면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이후 21세기 초반까지 양세기에 걸쳐 탁월한 성량으로 전 세계 클래식 팬과 일반청중을 매료시켰던 위대한 음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2007년 9월 6일 향년 71세를 일기로 그가 태어난 고향 모데나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했다는 訃告가 전파를 타고 퍼졌다. 이어서 9월8일 그의 장례식에는 이탈리아 정부요인들은 물론 세계적인 저명인사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수만 명이 장례식이 거행되는 이탈리아 모데나로 모여들었다.

조문객으로 참석한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와 코피아난 전 유엔사무총장 등 세계적인 저명인사들과 친지 800여명만 식장에 들어가고 나머지 5만여 명의 추모객들은 밖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조의를 표했다. 파바로티의 관은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해바라기 꽃으로 장식되었고, 그와 절친했던 소프라노 레이나 카바이반스카와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가 추모의 노래를 불렀다.

식이 끝난 후에는 공군기 10대가 공중곡예로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하는 빨강 초록 흰색의 연막을 내뿜으며 국장國葬 의식을 펼쳐보였다. 프로디 총리는 조사를 통해 “파바로티는 순간순간을 우리와 함께하며 이탈리아의 열정적인 외교사절”이었다고 고인에게 헌사를 바쳤다. 로마교황 베네딕토 16세도 “그는 신이 내린 천부적 재능을 가진 위대한 음악가였다”고 전했고, 조르조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은 “그는 이탈리아의 명예였다”며 애도했다.

파바로티와 함께 세계 3대 테너인 플라시스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는 “우리는 신이 주신 그의 목소리에 늘 경탄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를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할 것”이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우리가곡과 이탈리아 노래를 애창하는 나 역시 그를 추모하면서, 생전에 나의 어머님께서 “얘야,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람이 머리에서 지어내어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좋은 노래는 마음속 깊은데서 나온단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파바로티는 좀 과중한 체중이지만 짙은 일자형 윗 눈 섶과 시커먼 구레나룻에 고르게 보이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는 건장한 체력, 대단한 가창력으로 청중을 압도하고 매료시켜 커튼콜의 기록을 세워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는 언제나 라틴계 취향을 물씬 풍기면서 같은 시기에 영화계에 진출하여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나폴리 출신의 소피아로렌(1934)과 더불어 이탈리아의 명예와 상징으로 관직 없는 유능한 외교관으로 국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언제나 넉넉하고 진지한 자세로 열창을 하면서 이마에 송골송골 솟은 땀을 하얀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이 또 다른 정감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도 말년에는 40년을 같이 살아온 부인 아두아 베로니와 2000년에 이혼하고 36년을 함께 활동했던 매니저 헤르베르트 브레스린과 2002년 결별하였다. 그리고 2003년 35세의 연하 개인비서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올려 네 살 된 딸 엘리스를 남기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났다.

파바로티가 1977년 40대 초반 테너 기량이 왕성해 질 때 부른 ‘O SOLE MIO -PAVAROTTI'의 묵은 테이프와 84년도 L/A 공연 때의 테이프를 나는 보물처럼 간직하면서 그의 노래를 즐겨듣는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해양반도국가로 음악적 기질을 공유하는 것과 유행에 따른 패션도 있지만, 도.레.미.파.쏠.라.시.도의 음표와 고대 로마의 역사, 그리고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벨칸토 화법의 나폴리 민요가 더 친근감을 갖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중학생시절부터 파로티가 부르는 나폴리 노래 오솔레미오, 싼타루치아, 돌라오라 솔렌토 등을 부르면서 소피아로렌이 출연하는 이탈리아 영화를 즐겨보는 나폴리의 팬이 되었다. 1995년 봄 나는 1950년대 초 소피아로렌이 처녀 출연한 ‘河女’와 오드리 헵번의 첫 작품 ‘로마의 休日’이 만들어진 로마와 나폴리 그리고 산타루치아와 소렌토를 즐겁게 여행 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파바로티가 부르는 이탈리아 민요를 좋아하는 나에게 몇몇 지인들은 파바로티(?)라는 별명을 하나 붙여주었다. 아무튼 6.25 전란 때 병원선과 의료지원단을 보내 유엔군과 국군 부상병을 치료해주고 난민 수송과 구호에도 힘을 써준 이탈리아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 성지순례코스로 로마를 관광하면서 친근감이 들어 더없이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1984년 미국 L/A 올림픽 때 플라시스 도밍고(66), 호세 카레라이스(61)와 함께한 빅 스리테너 공연의 시작으로 파바로티는 도밍고 카레라이스와 같이 세계의 일반음악팬들에게 현장에서나 화면으로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제는 음반을 통하여 소리만 남기고 멀리 가버린, 파바로티는 위대한 테너 엔리코 카루소와 베니아미노 질리, 쥬세퍼 디 스테파노, 프랑코 코넬리와 마리오 란자 이상으로 천상의 목소리를 소유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양한 레퍼토리와 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색이 최고의 장점인 파바로티는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손꼽히는 헤르베르트 폰 카랴얀과 더불어 대중적 인기도가 가장 높은 클래식 음악가로 평가 받아왔다. 오페라 외에 연주회 음반을 통하여 폭넓게 활동하면서 인기절정에 있던 1977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독창회를 갖은 후 1993년 다시 내한공연을 가졌고, 2000년과 2001년에도 내한공연을 가진바있었다.

파바로티는 1935년 10월 12일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태어나 빵 굽는 아버지와 담배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정규음악공부를 하지 못했다. 9살 때부터 동네교회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십대 소년이 되었을 때는 축구에도 재능이 있어 프로축구선수가 되려는 꿈을 키워보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모아놓은 음반 속의 카루소와 스테파노를 선생님으로 가창연습을 하면서 천부적인 테너의 자질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2차 대전으로 패전국이 되어 국가 사회 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 파바로티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우선 생계를 위해 시간제 교사와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면서 정식 무대에 설날을 기다렸다. 마침내 테너로서 비교적 늦은 나이 26세 때 ‘푸치니의 라보엠’가운데 돌포 역으로 무대에 첫발을 딛고, 4년 뒤에 당대의 유명한 소프라노 ‘존 서덜랜드’의 공연에 출연하면서 세계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1965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과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 잇따라 데뷔를 하다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열린 도니제티의 오페라 ‘연대의 딸’ 무대에서 그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세 번째 옥타브의 ‘도’ 하이C음을 거침없이 9차례나 쏟아내어, 청중의 박수에 화답하기위해 무려 17차례의 커튼콜을 받았다.

해성같이 나타난 파바로티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커튼콜 기록을 깨면서 든든한 체구를 바탕으로 아무런 무리나 왜곡 없이 고음까지 곧바로 목소리를 올려 보내는 ‘하이C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1988년 독일에서 열린 오페라 ‘사랑의 묘약’공연에서는 박수가 1시간 7분이나 쏟아졌고 165차례의 커튼콜을 받으면서 이 부분 기록자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파바로티는 1990년부터 오페라 극장에서만 아니라 대형 야외무대로 활동반경을 넓히므로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는 파바로티가 불렀던 푸치니의 아리아 ‘공주는 잠 못이루고’가 테마곡으로 지정 되어었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이스와 함께 스리 테너(Three Tenors) 콘서트가 이탈리아 월드컵 전야제로부터 월드컵을 기념하는 대표적인 음악행사로 이어졌다. 이후 스리테너 콘서트는 세계투어와 음반 발매로 이어지면서 수백만 장의 음반판매고 기록으로 파바로티는 두 번째 기네스북에 오르게 되었다.

아디오 파바로티! (이탈리아 語로 파바로티 안녕히 가세요) ‘人生은 짧고 藝術은 길다’는 문자 그대로 파바로티의 거칠 것 없이 맑고 높은 음정과 청중들의 환호와 그칠 줄 몰랐던 커튼콜은 끝나버렸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神의 목소리는 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天國을 향해 가는 聖徒들의 찬양처럼‥‥‥

2007년 9월 21일 (순담)
출처 :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글쓴이 : 순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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